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춘향뎐
임권택, 2000
에퀴발랑스와 보존의 리얼리즘
한국영화사에서 ‘춘향전’의 뿌리는 유서가 깊다. 해방 후만 치더라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을 필두로 하여 근년의 <방자전>(2010)에서 시도된 현대적 변주에 이르기까지 물경 20편에 달하는 다양한 버전의 ‘춘향 이야기’가 존재한다. 하나의 스토리를 숱하게 번안, 각색한 이들 작품 가운데 최고의 영화적 성취라면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1999)이 단연 돋보인다. 아니, <춘향뎐>은 비단 <춘향전>의 역사 뿐 아니라 101편에 이르는 임권택의 필모그래피 안에서도 천의무봉의 경지라 할 만한 걸작이다. <춘향뎐>이 이전까지의 <춘향전>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어야만 하는 이유는 그것이 ‘판소리’를 번안의 기초로 삼았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기왕의 <춘향전> 영화들이 공중(公衆)이 선호하는 ‘이야기’로서 그것이 지닌 매력을 스크린에 옮겨 내는 작업에 몰두한 반면, 임권택은 ‘판소리’라는 한국적 연행의 양식이 서양적 시각체계에 근간을 둔 ‘시네마’의 형식과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조응할 수 있는가를 형식의 실험을 통해 입증하려 든다.
기념비적 논문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에서 프랑수아 트뤼포는 문학 작품의 영화로의 각색과 관련하여 ‘에퀴발랑스 Equivalence’라는 개념을 주창한 바 있다. 훌륭한 각색을 판가름하는데 있어 첫 손에 꼽히는 기준은 에퀴발랑스가 있는가의 여부인데, 트뤼포가 말한 에퀴발랑스란 문학적 표현에 부합하는 영화적 대체물을 의미한다. 요컨대 문자적 상상력에 값하는 영화적 표현의 형식을 찾았는가에 의해 각색의 성패가 가름된다는 것이다. 임권택이 시도한 ‘판소리의 영화적 각색’에 대하여 트뤼포의 기준을 적용하자면 <춘향뎐>은 창조적인 에퀴발랑스를 발견한 전범으로 손색이 없다. 판소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소리꾼(performer)의 노래(창)와 서술(아니리)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비시각적 연행의 형식이다. 객(客)들은 소리꾼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며, 노래와 사설의 리듬, 호흡을 따라 이야기의 공백을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춘향뎐>에서 임권택이 수립한 사운드와 이미지의 조응 전략을 서구의 뮤지컬 장르의 양식적 특징에 견주는 것은 맥을 잘못 짚은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춘향뎐>은 유니크한 서사의 구성을 통해 판소리에 내재한 고유한 양식성, 이를테면 이야기의 단위의 분절과 리듬,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심화되어가는 연행자와 청중의 밀착성을 영화적 형식으로 옮겨 내고 있다.
몇 가지 사실만으로 이것이 입증된다. 우선 <춘향뎐>의 서사구조를 일별하자면, 영화를 열고 닫는 명창 조상현의 판소리‘춘향전’완창 공연 사이에 본편이 삽입되어 있는 액자구성을 취하고 있다. 본편에서 소리꾼 조상현이 들려주는 노래와 설명은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기능을 하고 면밀한 계산에 따라 나레이션과 극중 배우들의 대사가 교차한다. 조상현의 판소리 공연 장면은 총 다섯 차례 삽입되는데, 내러티브 전개의 흐름 상 중요한 분기점에서 어김없이 등장한다. 예컨대 몽룡과 춘향이 만난 직후, 몽룡이 춘향을 떠난 이별 직후, 몽룡의 장원급제 직후에 공연 장면이 삽입된다. 흥미로운 것은 임권택이 다섯 번의 공연 장면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촬영했다는 것인데, 오프닝에서는 소리꾼을 잡은 단독 쇼트로 처리한 반면, 두 번째 공연 장면은 소리꾼과 객석을 정사/ 역사 구성으로 보여주고, 세 번째 공연은 소리꾼과 청중의 반응을 다양한 각도로 편집하여 시각화한다. 네 번째 공연은 무대와 객석이 동화된 풍경으로 나아가더니, 클로징은 판소리 공연과 본편이 디졸브되면서 합일되는 순간으로 마무리된다.
안과 바깥을 나누는 액자구조로 출발하여 액자의 프레임이 점점 그 경계를 지워버리는 조화로운 합일의 순간으로 끝나는 서사구조는 이미지와 사운드라는 영화적 표현의 형식을 통해 판소리를 영화적으로 번역해내려 한 작의(作意)를 성공적으로 달성하고 있다. 다섯 개의 공연 장면 사이에 끼워 넣어진 단락화된 에피소드 구성은 판소리의 서사 전개 방식과 영화적 어휘의 조화를 곳곳에서 연출한다. 특별히 임권택은 소리꾼의 입을 통한 구술 전개와 시각적 재현을 절묘하게 겹쳐놓음으로써 그 속성에 있어서 상이한 두 예술 매체(판소리와 영화)의 공감각적 합일을 이루고 있다. 소리꾼의 노래와 사설이 흘러갈 때의 리듬과 음율, 호흡의 고저/강약, 정서의 기복은 쇼트의 형태, 길이, 편집, 배우의 연기로 적확하게 번안된다. 스토리 공간 안에 존재하는 디제틱 사운드와 외재적으로 삽입된 논디제틱 사운드(소리꾼의 보이스 오버)가 하나로 합쳐지고 판소리의 언어가 영화의 어휘로 번역되는 마술 같은 순간들을 곳곳에서 체험할 수 있다. 이처럼 <춘향뎐>의 모든 시퀀스는 판소리의 신명과 감흥을 대체하는 영화적 에퀴발랑스를 성립시킨다. 임권택은 여기서 “영화화할 수 없는 장면은 없다”는 영화적 각색의 명제를 입증하는 한편, 다루는 대상과 질료의 성질을 훼손하지 않고 영화로 옮겨 오는 ‘보존의 리얼리즘’을 구현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