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몇 년전 다큐멘터리에 대한 질문, 그리고 지금 <오월애>
어렸을 때부터 나는 공동체나 신념을 위해 헌신하는 비장한 남성들에 매혹되곤 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난 대학을 졸업할 무렵까지 영화광도 아니었고 심지어 관심도 없었지만, 그러한 남성들에 대한 첫 번째 매혹에 대한 기억은 영화였다. 언제쯤이었을까? 아마 내가 열 살 즈음이었을까? TV에서 방영되는 <새벽의 7인>을 보았다. 레지스탕스라는 어려운 용어는 물론이고 나치나 유태인이 뭔지도 몰랐을 그 시절,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나치에 포위된 두 명의 청년이 어느 건물 지하실에서 최후의 저항을 하자, 나치는 지하실로 물을 채워 넣기 시작한다. 그 물이 거의 천장까지 차오르자 이 두 청년은 서로를 끌어안고 각자의 머리에 총을 겨눠 자살을 하고만다. 이 숨막히는 마지막을 지켜보면서, 나는 그들이 살아남기를 정말이지 간절히 소망했다. 그들이 투항하기를 바랐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들이 최대한 머리를 지하천장 가까이 치켜들면 익사하지 않으리라는 응원을 열심히 했었다.
그리고 대학시절, 정규 수업은 거의 출석하지 않았고, 사회과학 동아리였던 세미나에 더 열중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가져온 <칠레에 관한 모든 기억>을 보게 됐다. 내가 다큐멘터리에 관심을 가지게 한 첫 번째 영화였다. 선거를 통해 집권한 사회주의자 살바로드 아옌데의 혁명과 이에 대한 피노체트 반혁명(쿠데타), 그리고 민중 학살에 관한 작품이었다. 공군 전투기가 산티아고의 대통령궁을 폭격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채 스무명이 안 되는 동지들과 달랑 권총 한 자루 들고 저항하는 아옌데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그의 육성 라디오 메시지는 내 넋이 다 나갈 정도로 소름끼쳤다. 비장한 남성들에 대한 매혹은 자연스레 운동으로 연결됐고, 그 다음은 영화였다. 그 순간 처음으로 나도 ‘다큐멘터리 운동’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정말로 나는 다큐멘터리 진영에 기웃거렸다. 대학 4학년 즈음에 벌어진 노동계 총파업때(노동법 날치기 통과 반대 투쟁) 학교 영화패 선배를 쫓아 명동 향린교회에 꾸려진 ‘총파업공동영상제작단’을 찾아가 그곳에서 내게 주어진 아주 사소한 심부름을 하면서도 뿌듯해 했다. 이후 대학을 졸업하고 1년 정도는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꾸린 이론분과에 참여했다. 선배들에게 거창하게 내 포부를 드러내진 못했으나, 나 홀로 각종 다큐멘터리 이론 책들과 논문들을 읽으며(주고 다큐멘터리의 형식주의 관련 논문들) 내가 만들고 싶은 작품을 상상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내가 결정적으로 ‘운동’ 혹은 ‘다큐멘터리’와 멀어진 것은 영화에 대한 매혹과 지식이 더 커져가면서였다. 얼마 후 ‘씨네21’을 통해 평론가로 등단했고, 이후 다시 ‘영화는 예술이며, 감독은 작가다’를 죽어라 외쳐대는 KINO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됐다. 그 즈음 우연히 만난 노동자뉴스제작단의 이론분과 선배는 내게 농담처럼 ‘배신자’라고 했다. 그냥 웃고 말았지만 쓰리기도 했다.
몇 년 전 모 영상위원회의 ‘독립영화 DVD 제작지원’ 분야 심사에 참여했다. 이번에 <오월애>를 연출하신 김태일 감독님 역시 심사에 참여하셨다. 난 그때 심사장에서 그분께 했던 내 질문을 아직도 후회한다. “요즘 다큐멘터리들은 왜 이리 나이브한가요? 형식에 대한 고민들이 없는 것 같아요” 당시 나는 취지와 메시지에는 공감하나 만듦새와 형식이 너무도 불만이었던 한 작품에 대한 선정 여부를 두고 갈등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 질문은 걸작과 작가에 경도된 지금의 영화취향에서 가능한 질문이었고, 한국에서 독립다큐멘터리를 한다는 것이 수반하는 무수한 싸움과 한계들을 외면한 질문이었다.
얼마 전 지인과 <오월애>를 보러갔다. 관객은 우리뿐이었다. 덕분에 아무 거리낌 없이 영화가 관객에게 던지는 질문들에 대해 즉각적으로, 큰소리로 토론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 초반부 시민군이었던 남자가 뱉어내는 내래이션은 묘하게도 내 가슴을 쳤다. “30년 동안 기억의 감옥으로부터 한번도 자유로운 적 없었다. 해마다 5월이 되면 몸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소름끼쳤다. 망각에 대한 죄의식, 도청에 대한 논쟁들, 죽은 자에 대한 예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 학살과 위정자들. 그 모든 공포들을 상기시키는 작품이었다.
며칠 후, 모 영화과 교수님과 이야기하던 중 <오월애> 이야기가 나왔다. 그는 <오월애>의 나이브함이 아쉽다 했다. 정말로 이 작품이 나이브한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그 용어를 어떤 의미로 썼는지는 알 것 같다. 30년이 지나도록 미완인 역사, 그것도 망각 속에 봉인되려는 역사에 대한 총체적 시각이나 해석을 제공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증언자들의 진술이 주관적이고 감정적이며, 선택된 인물들은 당시 광주를 상상하기엔 다소 느슨해 보인다. 이 영화엔 여백이 많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나이브함이라 한다면 나는 그것을 오히려 <오월애>의 미덕으로 간직하려 한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걸작과 작가주의에 경도된 나의 영화적 취향을 너머, 지난 시기 운동과 다큐에 대한 매혹과 열정을 일깨운 작품이다.
80년 광주는 조직화나 체계화된 운동이 아니라, 철저하게 억업받고 빈곤했던 시민들의 삶의 몸부림이었다. 이후 진행된 약간의 민주화니 보상이니, 역사적 재평가니 하는 것들도 어쩌면 지식인인양 하는 자들 혹은 정치인들의 포장되고 왜곡된 언술에 불과했는지도 모른다. <오월애>의 힘은 당시 광주에, 그날 그곳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직접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기층민중의 역사를 지식인들이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역사를 그들 스스로 발언하게 하고, 그들을 역사적 주역으로 내세운다는 점에 있다. 영웅화된 몇몇 열사가 아니라, 그곳에서 이름조차 없이 죽어간 무수한 목숨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의 힘겨운 기억들. 구두닦이, 식당주인, 노점상, 과일행상, 고등학생... <오월애>는 그들의 투쟁과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를 상기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작품인 것이다.(광주나 칠레를 비롯하여 잔혹한 학살을 경험한 희생자들은 이후 수십년 동안 발언을 금지 당한다. 발언 그 자체가 고통이거니와 더 큰 문제는 그것이 또 다른 억압과 처벌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내 유년기에서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영화 속 비장한 남성들, 레지스탕스에서부터 아옌데까지. 그러나 <오월애>는 그 비장한 영웅들의 현실 속 주체와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운동으로서의 영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성’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오월애>의 사람들, 그날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그 어떤 압도적 형식미학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오월애>는 ‘저항’과 기층민중의 힘을 믿는 작품이다. 그래서 훌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