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독립영화를 다시 생각한다
혼자 살던 집에 두 식구가 새로 들어온 게 벌써 재작년 일이다. 남자친구가 무턱대고 주워온 고양이 두 녀석. 남자아이는 콩이, 여자아이는 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삼십대 중반을 넘기도록 집에서 동물 한번 키워본 적이 없고 고양이의 ‘고’자도 모르고 오히려 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편견만 가지고 있던 나는 졸지에 두 아이의 엄마, 그것도 초보엄마가 되어 좌충우돌을 겪었다. 더욱이 아이들이 길에서 한 달을 살았던 만큼 건강상태나 발육이 그리 좋지 않았고, 특히 콩이는 ‘너무 못 먹어서’ 앙상한 몸에 회충과 설사로 고생하며 위험한 시기도 겪었다. 그리고 벌써 2년. 이제 다음 주에 2살이 되는 콩이와 뚱이는 동네 길고양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우람한 체격을 지닌 이른바 ‘돼냥이’로 자랐다. 이제 나도 나름 고양이에 대한 지식이 늘어 트위터에서 돌발상황에 당황해하는 서툰 초보엄마들에게 잘난 척하며 조언을 줄 수 있게 되었고, 늦게까지 술을 먹다가 혹은 출장을 갔다가도 아이들이 눈앞에 어른거려 귀가를 서두르고, 집 앞 골목을 다니는 길고양이들이 눈에 밟혀 대문 앞에 이따금 사료를 놓아주는 전형적인 ‘캣맘’이 되었다.
바뀐 것들이 또 있다. 사실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는, 고양이 키우는 사람들의 삶을 블로그를 통해 슬쩍 들여다 볼 때마다 그들이 너무 과민하고 때로 히스테리컬하다고 생각했다. 소소한 것에 지나치게 분노나 감격을 표현하는 것도 유난스러웠고, 때로는 ‘살아있는 동물’을 상대로 “좀 비싼 취미를 누리는 듯한”, 나아가 그걸 기어코 과시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아이들을 기르는 데에 필수적으로 필요한 사료나 모래 외에도 온갖 고양이 장난감, 혹은 캣타워 같은 것들을 ‘지른’ 인증사진을 올리며 호들갑을 떨거나 유난히 비싼 사료와 비싼 모래를 샀다고, 혹은 ‘생식’을 먹인다며 정성을 쏟는 모습이 요란스레 느껴졌고, 나아가 “내 아이에겐 최고만을!”을 외치는 광고 속 극성 엄마들의 모습을 떠올렸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아이들을 키우면서, 그런 식의 유난과 과민함이 실은 고양이를 향한 편견과 학대가 만연한 현실에서 유래한 일종의 자기방어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전에는 몰랐던 동물 학대, 특히 고양이 학대의 실상을,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되면서 고양이를 키우고 아낀다는 것이 일종의 ‘소수자 정서’에서 유래한 것임을 느끼게 된 것이다. 당장 가까운 지인만 해도 고양이를 키운다니까 즉각적으로 “고양이는 요물인데...”라 반응하는 걸 보면서 얼마나 놀랐던가.
아이들은 내게 기쁨과 즐거움과 위안만 주지 않았다. 과연 ‘영물’과 ‘요물’의 단어 뉘앙스의 차이는 뭘까 생각하고, 동네 식당의 주인 아주머니가 손님이 먹고 남긴 음식을 길고양이들에게 주는 걸 보며 감격하고, 동물학대 사건을 좀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관심을 갖게 되고, 육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그러나 육식성인 아이들을 보며 자연의 먹이사슬을 받아들이게 되고, 동물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게 되고, 개고기와 동물권을 둘러싼 논쟁을 보며 자료들을 찾아보게 되고... 아이들은 내가 모르고 있던, 혹은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던 묵직한 생각거리들을 바로 눈앞에 산처럼 쌓아주었다. 그리고 내 삶에서의 변화와 입장 정리, 그리고 실천을 요구받는 상황에 왔다.
독립영화가 내 삶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도, 뚱이와 콩이가 내 인생의 일부가 된 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창간호부터 99권을 꼬박 모았던 <키노>에서 처음 독립영화를 접하고 한독협과 인디포럼의 존재를, ‘서영집’과 ‘노뉴단’과 김동원 감독을 알게 됐지만, 오랫동안 독립영화는 내게 “그런 게 있다”는 정도의 존재였고 굳이 찾아가 접하기엔 어쩐지 두려운 대상이었다. 여러 ‘고전’ 독립영화들을 제목만 알았을 뿐 실제로 보지 못한 영화가 대부분었고, 내게 독립영화는 오랫동안 ‘정치적 주제에 너무 많이 집중하며 지나치게 선동을 주 목적으로 하거나,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관념적인'' 영화였다.
하지만 독립영화에 좀더 가까이 가 무작정 영화를 보기 시작했을 때,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얼마나 빙산의 일각만을 보는 왜곡된 시선에 불과했는지 알게 됐고, 독립영화가 일반적인 상업영화와는 또 다른 차원의 거대한 세계라는 걸 깨닫게 됐다. 독립영화를 통해 이루어진 ‘발견’은 새로운 기쁨과 새로운 미학의 탐구 가능성을 안겨주었고, 이는 영화를 보는 눈과 영화를 향한 내 사고의 차원을 한 뼘 더 넓혀주며 새로운 영화를 상상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나는 새로운 걱정과 근심까지 받아안게 되었다. 독립영화를 둘러싼 환경과 지난한 문제들, 그리고 정책과 시장에 대한 고민들, 그리고 영화가 사회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한 성찰과 통찰 같은 문제들 말이다.
이를테면 내가 가장 딜레마로 생각하며 고민하는 것들엔 이런 것들이 있다. 적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무보수로, 혹은 적은 돈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스탭들은 또 다른 형태로 서로 노동을 착취하고 착취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 자본에 대한 일정한 경계와 때로 독립을 주장하며 만들어지는 독립영화가 사람들과 널리 교감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시장에서 어필해야 하는 상황, 혹은 시장에서 성공했을 때 겪게 되는 또 다른 문제들, 기존 자본에 기댈 수 없기 때문에 결국 다양한 형태의 국가 및 공적 보조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다시 국가나 공공기관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 등등. 만들어진 영화를 그저 보는 입장에서도 고민하게 되는 이런 것들을, 일선에서 직접 독립영화를 만들고 제작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뼈저리게 느끼며 매일매일 고민할까. 사실 인디포럼도 한독협도 그리고 인디스토리와 시네마 달과 같은 독립영화 전문 배급사도, 독립영화전용관과 디지털 영화 제작의 붐도 이러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공동체 상영도, 독립영화 전문 온라인 배급사도, 블로그와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이용한 마케팅도, 모두 당대 독립영화와 시대를 붙잡고 고민과 토론을 거듭한 끝에 거머쥔 산물이다. 그렇게 찾은 것들을 시도하며 얻은 성공과 실패의 경험, 새로이 안게 된 고민으로 또다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내고 있는 것이 지금의 독립영화다. 최근 들어 새로이 시도되고 있는 ‘공공제작’ 혹은 ‘사회적 제작’의 형식도, 어렵사리 극장개봉을 한 독립영화 감독과 배우들이 혹독하리만치 빡빡한 일정의 GV를 자청하며 계속해서 직접 관객을 만나는 것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영화의 위상이 예전만 같지 않고 영화를 둘러싼 환경이 급박하게 변하는 한편 자본은 두드러지게 양극화로 편제되고 있다. 충무로에서 재미없는 영화들만 그야말로 ‘양산’되고 있는 이때, 독립영화는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신 비약과 도약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더 큰 싸움을 준비하며 더욱 고단하고 암울한 상황, 그리고 새로운 차원의 고민을 맞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내가 독립영화를 보고 독립영화를 지지하며 독립영화를 둘러싼 고민에 함께 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치열하게 독립영화를 고민하고 독립영화를 만들며 싸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되는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그러나 글 쓰는 이로서 느끼는 의무감 역시 새로운 차원의 것이 된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이를 위해 최근 나는 한독협 비평분과에 회원으로 가입했다. 앞으로 내가 쓰는 글이 더 이상 ‘주변인’ 혹은 ‘관객’으로서 한발 물러서 있는 글이 아니라, 함께 싸우고 함께 고민하며 함께 나아가는 과정의 글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