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독립애니메이션, 다져진 제작 시스템으로 자존심을 사수하자
유아용도 아니요 가족용도 아닌 잔혹 스릴러 장르의 독립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든다고 했을 때, 그 끝을 볼 수 있으리라고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반년을 오로지 홀로 쓰고, 그리고, 칠을 했다. 그의 의지를 알아줬을까. 장편애니메이션 규모로는 누가 봐도 초저예산인 1억원이라는 제작비를 지원받아 1년이라는 기간을 더해 <돼지의 왕>이라는 제목의 독립 장편애니메이션을 완성 시켰다. 그렇게 <돼지의 왕>을 기획하고 제작한 이는 중편 애니메이션 <지옥>, <사랑은 단백질>를 만든 연상호 감독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을 관심 있게 봐왔다면 예상할 수 있겠지만 <돼지의 왕> 역시 한국애니메이션에서 보기 힘든 핏빛 색채가 가득하다.
물러서지 않는 뚝심과 자존심으로 완성된 연상호 감독의 첫 장편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오늘의 비젼’ 부문에서 일반관객들에게 첫 선을 보였고, 좋은 반응을 받았다.
상업 시스템 안에서도 장편애니메이션 한편 생산해 내는 것이 때론 청춘과 불혹의 시절을 반납해야 하는 고된 일임을 우린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개봉시기가 되면 10년 동안 몇 만장의 그림을 그렸다는 노고를 홍보 마케팅 문구로 자주 내세운다. 땀 한 방울 한 방울이 묻어있는 그 흔적을 그 아무도 폄하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최소 1년에 한 편씩의 장편애니메이션이 꾸준히 극장에 걸렸으면 하는 바람으로 생각해보면 그다지 바람직한 제작구조는 아니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투자자 입장을 생각해도 투자금의 회수를 5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그들의 지갑을 쉽게 열게 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생각도 더불어 든다.
또한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모순 중에 하나인 다수의 노동과 희생이 소수의 영광에만 집중되는 현상을 장편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서도 자주 발견되곤 하는데, 제작사나 감독의 입장에서는 그 힘든 시절을 참고 견딜만한 이유가 있지만 때론 최저임금도 받지 못한 채 꿈을 그려야하는 스탭들 입장을 고려해보면 극복해야할 구조이지 자랑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좀 더 나가서, 필자는 과연 한국의 경제상황에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이 적절한가에 대한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한국에서 몇 십억이 상업 장편애니메이션에 투입되었다고 한들 그 기나긴 제작 기간을 따져보면 스탭들이 감수해야할 희생은 비약일지는 모르겠지만 70년대 어느 공장의 노동자들을 연상시킬 때도 있다. (비약만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건 재능 있는 많은 애니메이션 전공자들이 타 분야로 전향하지 않는가.) 물론 필자도 예술적 가치와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재미를 충족 시켜줄 수 있는 장편애니메이션이 한국에서 많이 제작되길 희망한다. 그러기에 다수의 희생을 줄일 수 있는 제작 시스템은 필수라고 생각되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돼지의 왕>은 제작비 1억원, 제작기간 1년이라는 산술적 계산아래서 도전적인 기술의 시도와 그동안 <지옥>, <사랑은 단백질>을 제작하며 다져진 제작 시스템으로 스탭들의 노동을 최소화한 작품이다. 또한 시장논리로 봐도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막대한 자금의 투입으로 인해 손실될 수 있는 작품의 진정성과 예술적 가치를 사수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되어 진다.
상업 장편애니메이션 또한 그렇지만 단편으로 시작해서 장편을 꿈꿔온 독립애니메이션 감독에게 취약했던 부분은 바로 이 프로듀싱 능력이었다. 독립애니메이션 감독들이 자신의 작품 세계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바람직한 근성이 있다면 그들이 고민하고 공유해야 할 것은 작가 정신을 상실하지 않고 풍부하게 담을 수 있는 제작 시스템이다.
연상호 감독은 <지옥>, <사랑은 단백질>심지어 외주 영상을 제작할 때도 무작정 땀을 흘리는 것이 아닌 빠른 작업속도와 효율적인 기법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연구해 왔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와 탄탄한 드라마는 기본이지만 좋은 작품을 만들겠다는 생각만이 아닌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에 적합한 제작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돼지의 왕>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돼지의 왕>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이어 11월이면 본격적으로 일반관객들을 만날 계획이지만 모든 관객들을 흡수하기는 힘든 장르적 특성을 갖고 있는 건 사실이다. 실사영화도 아닌 애니메이션에서 `잔혹 스릴러`라니. 그것도 유아, 가족용 애니메이션 콘텐츠가 장악하고 있는 이 한국에서.(이 상황자체가 잔혹하다.)
필자는 <돼지의 왕>이 예술인으로서의 포부와 자존심을 꿋꿋하게 사수하고 있다는 것이 관객수와 상관없이 조명 받아야할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시장주의 논리로 <돼지의 왕>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자존심을 지키려는 어느 창작자의 의지와 고민을 <돼지의 왕>을 통해 엿볼 수 있기를 바란다. 원론적인 이야기여서 말하기도 듣기도 고루한 가치, `문화의 다양성`. 새로운 성공 모델이 생산될 때마다 모든 판단과 가치의 기준이 그 모델에 집중되는 속성에 독립애니메이션이 휘둘리지 않으려면 짧은 단편 한편 제작하더라도 제작 시스템을 다지고 또 다져야 한다.
<돼지의 왕>이 그 시작이 되어 방안과 대안을 공유하고 고민하여 잔혹 스릴러든 리얼 사회 드라마든 시장에 영합하는 것이 아닌 예술로서 소통하려는 의지가 충만한 독립장편애니메이션이 1년의 한편씩 꾸준히 관객들에게 선보였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