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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한 없이 두 개의 문이 나타나는 시공간

[칼럼]한 없이 두 개의 문이 나타나는 시공간 대표 이미지

최근에 본 독립다큐멘터리 몇 편에 대한 이야기로 말을 시작해 보자. 먼저 <용산>과 <두 개의 문>. 이렇게 <용산> 옆에 <두 개의 문>을 놓으면, 그 둘이 하나의 쌍을 이뤄 또 다른 ‘두 개의 문’이 된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이론이나 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순간 진정한 사유를 시작하게 되는 것이라면, <용산>은 용산참사를 목도한 후 그런 진정한 사유를 위해 몸부림치는 한 인물을 보여준다. 왜 저런 일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일까? 도대체 저건 뭘까? 이런 의문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 그리고 역사를 둘러본다. 반면 <두 개의 문>은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지금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일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어머니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자신의 어머니부터 알아야 하듯이, 특수성에 대한 탐구가 결국 보편성에 다다르게 되듯이, <두 개의 문>은 지금 당장의 진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 ‘순간의 진실’이 결국 ‘보편적 진실’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어찌 보면, 핵심은 진실규명에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진실은 이미 드러났다(어쩌면 <두 개의 문>에 의해서). 그렇다면 핵심은 그 드러난 진실에 어떻게 현실적 힘을 부여할 것이냐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 다른 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머니>에 놓인 이소선의 문과 전태일의 문, 혹은 영화의 문과 연극의 문.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역방향으로 흐르는 영화의 시간과 기획 단계부터 시작하여 순방향으로 흐르는 연극의 시간은 언젠가 한 지점에서 만날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영화적 에너지가 폭발할 것인데 감독은 거기에 와다 하루키 교수와의 인터뷰를 놓았다. 그 때 들려지는 어머니의 증언은 그녀의 삶과 전태일의 선택을 이해하게 한다. 여기서 또 다른 문 하나가 나타난다. 이런 구성이 연극의 과도한 비중을 정당화하고는 있는데 감독은 왜 연극이란 시공간을 필요로 했을까? 이소선과 전태일, 그 둘의 무게감을 감독은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래서 연극이란 완충지역이 필요했던 것일까? 연극의 시공간에서 그 둘은 만나고 헤어지며 우리도 그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논란이 되곤 하는 음악의 선택 역시 그런 무게감을 덜어내는 작업의 일환으로 보인다. 이것은 진정성의 다른 표현이자 태준식의 문과 이아립의 문이다.

문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불현듯 열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음악신탁단체의 공연권 징수안이 그렇다. 그 과정에서 독립영화는 돈으로 환산되는 개념이 되어버린다. 여기엔 모든 것을 수치로 환산하여 계산하는 공리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공리주의적 태도는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국익론’이라는 형태로 한미 FTA에 대한 찬반 여부를 결정짓는 주요 잣대로 사용되어지기도 한다. 이렇게 다시, 또 다른 문이 하나 열린다. 그리고 용산 진압의 속도전을 낳은 것은 재개발 사업에 직접투자를 시작한 금융자본 때문일 것이다. 또한 용산 미군기지와 강정 해군기지 역시 동전의 양면 같은 ‘두 개의 문’일 것이다. 이렇듯 용산참사와 금융자본도, 한미 FTA와 신자유주의도, 공연권 징수안과 지적 재산권도, 모두 ‘두 개의 문’을 구성하며 스스로도 각자의 문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자꾸만 나타나는 ‘두 개의 문’들은 벌집처럼 이어져 거대한 하나의 문을 이루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꾸 자꾸 열다보면 그 거대한 문이 열릴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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