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내가 몰랐던 영화들
회화, 특히 한국화를 전공하고 있는 친구와 며칠 전 맛난 밥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다. 또래 다른 친구들과 달리 이 친구는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 그러니까 영상의 움직임이 힘들다고 했다. 그래서 불과 근래까지만 해도 영화를 일 년에 겨우 한두 편 볼까말까 했다고 한다. 지금 20대에서 30대 초반에 해당하는 친구들이 워낙 어릴 적부터 동영상이 익숙한 나머지 영상 감각이 기본적으로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해온 나로서는, 이 친구의 그런 이력이 자기 또래 세대에서 좀 독특해 보였다. 실제로 요 근래 데뷔하는 젊은 감독들의 경우 영상의 미학에 대한 기본적인 감이 매우 뛰어난 경우가 많다.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시간의 배열과 왜곡’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뚝딱 해내기도 한다. 나처럼 아직 서사와 문자텍스트가 좀 더 익숙한 사람과는 기본적인 인지능력 자체가 아예 다른 세대랄까. 어쨌든 내 주변은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고 자주 보는 사람들, 심지어 영화로 밥을 먹고 있는 사람들 투성이인데, 나나 내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어떤 것들이 이 친구에게 전혀 당연하지 않다면, 이 친구는 나와 같은 영화를 봐도 전혀 다른 것을 볼 것이다. 나는 이것이 너무 궁금해졌다. 앞으로 그 친구와 내가 공통으로 본 영화들에 대해 그 영화에 대한 그의 감상을 꼬박꼬박 물어볼 생각이다.
영화가 익숙하고 친숙할수록, 영화에 일반적으로 반복되는 영화문법과 관습, 혹은 형식을 절대적으로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영화의 기술들은 초창기 영화 시절 선구자였던 감독들, 예컨대 그리피스 같은 이들에 의해 발명되고, 약속되고, 이 약속이 받아들여진 것에 불과하다. 즉, 생래적으로 원래 당연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을 당연히 여기도록 오랜 시간 동안 알게 모르게 훈련되고 익숙해진 결과라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가 친숙하게 여기는 영화문법은 대체로 초창기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에 의해서다. 자기들만의 영화왕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옛 소련의 영화들로 오면 이런 ‘익숙한 문법’과는 전혀 다른 ‘신기하고 새로운’ 영화들이 즐비하다. 예컨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대사를 하는 스파이크 리 감독의 80년대 영화들의 인물들은 ‘금기를 깬 새로움’으로 각광받았지만, 파라자노프 감독의 30년대 영화에서는 심지어 두 인물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둘 다 정면을 보고 있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가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기는 어떤 관습들이 실은 주류 할리우드 영화의 문법에 불과할 뿐 아니라, 실은 ‘극영화’의 문법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이르면, 우리가 ‘알고 있다’ 생각하는 영화의 특징들이 실은 얼마나 편협하고 좁은 범위에 불과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미국이나 러시아처럼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나라 독립영화 감독들의 영화부터가 그렇다. 극영화에서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미디어아트로 넘어오면 이런 문법과 형식의 제한의 폭은 갑자기 확 넓어진다. 국내 독립영화들을 본격적으로 챙겨보기 시작했던 2000년대 중반에 나는 이른바 ‘멘붕’을 경험했었는데, 기존의 영화를 보던 눈으로는 도저히 ‘좋다’고 할 수 없는 어떤 영화들을, 그렇다고 ‘나쁘다’거나 심지어 ‘후지다’고도 말할 수 없는 어떤 지점들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상업 극영화,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에 맞춰져 있던 좁은 미감은 그러한 범위 내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을 좋거나 나쁘다고 구분할 수 있게 해줬지만 동시에 그 범위를 벗어나는 영화들을 제대로 볼 수 없는 한계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2000년대 말에 보다 다양한 포맷의 다큐멘터리와 실험영화들을 접하면서 또 한 차례 ‘멘붕’을 겪었다. 세상에 이런 다큐멘터리가 있을 수도 있구나. 느슨하게 다큐멘터리 혹은 실험영화로 구분되는 미디어아트 작품들은 더하다. 최근에 이런 미디어아트 작품들을 중심으로 한 영화제의 예선에 일종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또 한 번 ‘멘붕’을 겪었다. 아 정말, 세상은 넓고 영화는 많다. 내가 몰랐던 영화들이 너무 많다. 게다가 비디오의 보급은 물론 디지털 혁명을 겪으면서 더욱, 영화는 이제 과거의 ‘영화’라는 단어로 도저히 포섭할 수 없을 만큼 사방팔방으로 도약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영화제에서 예선 심사를 하면서 나는 작년과 올해 문제작이라 할 만한 온갖 단편영화들을 보게 되었는가 하면 미술과 회화, 퍼포먼스에서 시작해 영상으로 넘어온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의 독립영화와는 또 다른’ 영화들을 보게 되었다. 안타깝게 그 영화제에서 상영이 되지 않을 것으로 결정 난 작품들 중에서 아쉬운 작품들도 많았지만 내심 다시 보고싶은 욕심이 생기는 영화들도 많았다. 문제는 여전히 이런 영화들을 볼 수 있는 환경이 제한돼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인디플러스가 자리를 잘 잡아 다행이고 인디스페이스가 다시 문을 열어 천만다행이고, 인디다큐페스티벌과 인디포럼 같은 영화제가 온갖 에피소드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올해도 열렸단 게 다행이다. 그리고 곧 네마프와 신디도 열린다. 하지만 이런 장소들과 영화제는 여전히 우주에 별처럼 빛나는 작품들을 담기에는 여전히 적고 좁다.
사실 나는 이렇게 새로운 형식과 포맷으로 등장하는 새로운 영화들이 너무 무섭다. 볼 때마다 내가 알고있던, 내가 보아왔던 영화들이 얼마나 좁은 우리 안에만 한정돼 있었는지 새삼 일깨워주는 작품들. 세상은 많고 볼 영화도 많으니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데, 오래오래 살 그동안은 또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나와 내게 멘붕을 또 얼마나 더 선사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