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반복되는 세간의 시선...

[칼럼]반복되는 세간의 시선... 대표 이미지

세간의 시선이라는 것이 있다. 영원하지 않는 것들이 모여 세상만사 이러저러한 말들을 드러내며 하나의 대상을 일반화하려는 경향을 이야기한다. 이런 시선은 세상을 해석하는데 효율적이긴 하지만 사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일반화로 인해 대상에게 상처가 되기도 한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은 물론 그 시장으로의 유혹 따윈 안중에도 없었던 독립다큐멘터리에 대한 세간의 시선 또한 존재했었다.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편하게 호명 당했고 짐작만 하던 사실로 인해 오해받기도 했다. 

몇 년 전 일. 어느 여성감독 작품 관객과의 대화 자리. 사회자와 감독과 한 문화평론가는 의례적으로 상영된 작품에 대한 상찬으로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 문화평론가는 ''''지금까지의 노동다큐에서 노동자들이 자는 모습이 나왔던 것을 본적이 있던가?''''라는 말을 하며, 동석한 감독의 작품을 칭찬해 들어갔다. 자신감에 찬 표정으로 말이다. ''''자는 모습''''이라... 그에게 독립다큐멘터리는 빨간 머리띠로 상징되는 ‘이미지’와 조직과 집단을 중요시 하는 ‘서사’로만 채워져 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노동자들의 ‘자는 모습’이 신선하면서도 영화적 표현으로 전환된 결과에 만족할 수밖에... 물론 그 평론가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기존 독립다큐의 ‘강박’에 대한 우회적인 비판이었으리라. 잘못 알아들었던 것도 아니고, 조금 더 그 부분에 관한 제안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관객들에게 전달되어진 앞서 이야기한 평론가의 전제였고 그 전제가 마이크와 스피커를 타고 관객들의 웃음보를 자극한 순간이었다. 관객들은 ‘자는 모습’도 허용하지 않았던 기존의 노동다큐를 조롱할지도 모를 일이다. 세간의 시선은 강화되었다. 노동자들이 농성장에서 난장을 까고 ‘자고 있는 모습’은 이전 노동다큐에서 수도 없이 많았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요즈음 용산다큐 <두 개의 문>에 대한 평론이 차고 넘친다. 대부분 이 소재를 다루는 감독의 연출력에 놀라워했고, ‘용산참사’의 풀리지 않는 숙제는 환기되었으며 독립다큐멘터리가 극장에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분석과 평가가 이어졌다. 이중 특히 눈에 띠는 평론이 있었는데 주간경향 981호에 실린 한 영화평론가의 <두 개의 문>에 관한 글이다. 그는 여기서 <두 개의 문> 이전, 기존 한국 다큐(내용으로 보아 독립다큐로 봐도 무방하겠다)의 위험한 경향에 대해 언급하며 <두 개의 문>이 그 경계를 넘어선 작품으로 동시대 다른 다큐 감독들에게 기준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남겼다. 이런 상찬이 있을까? 물론 나도 이런 상찬에 동의하고 그런 언급을 받아야만 하는 작품으로 <두 개의 문>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만 그 글 안에는 앞서 이야기 한 ‘자는 모습’이라 칭해진 전제, 세간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평론가의 전제된 어떤 ‘상상력’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효율적인 글쓰기를 위한 지나친 일반화로 인해 <두 개의 문> 이전의 독립다큐 창작자들은 그 위험한 경향(?)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 전제의 가장 큰 문제는 가령 이런 멘트이다. “나는 진영의 논리에 기반해 아군과 적군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화두를 다룰수록, 감독이 활동가가 아닌 집요한 창작자로서의 태도를 고집하며 진영으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혜택과 결별해야 한다고 믿는다.”이다. 구구절절한 독립다큐에 대한 그의 걱정과 창작자들에 대한 충고에 대해선 선의를 믿는다는 차원으로 이해하려 한다. 다만 독립다큐 창작자들이 진영으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혜택’이란 도대체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는다. 진영의 논리로부터 자유로 와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주장과 독립다큐 창작자들이 진영의 혜택을 받고 있다는 전제가 어찌 같이 이야기 될 수 있을까? 어느 진영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애매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글 속에서 어떤 진영과 작품들인지 정확히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동네의 문화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다큐 창작자들이 ‘혜택’을 받고 있다 보는 것은 아주 큰 오산이다. 일 년에 제작되어지는 독립다큐멘터리가 60~70편에 이르는데 이 중 어떤 조직으로부터 제작비를 지원받아 만들어지는 작품은 손에 꼽힐 정도이다. 비굴하게 ‘우리 어려워요!~’ 라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어려우니 도와 달라는 이야기도 이쪽 동네의 상업영화 논리에 가려져 메아리 없는 호소뿐임을 알아줬으면 한다. 그리고 그가 걱정하는 독립다큐를 수렴하는 이쪽 동네의 문화로부터 받은 혜택도 없다. ‘고생했다’라는 말을 들으면 그나마 다행인 것이고 그의 말처럼 TV다큐 보다 떨어지는 때깔(?)과 사회적 파장의 미미함 때문에 돌아오는 것은 측은한 눈빛뿐이다. 독립다큐의 가치와 의미를 재생산 하는 것도 이 동네의 창작자들 스스로 해야 하는 처량한 신세. 사정이 이럴 진데 어찌하여 독립다큐 창작자들이 진영의 혜택으로부터 결별하여야 한다는 충고 아닌 충고를 들어야 하는 것일까? 그 글속 평론가가 상정한 독립다큐 창작자들은 있지도 않은 진영의 혜택 따위에 안주하는 창작자로 호명되어졌고 그 글을 읽은 관객들은 ‘두 개의 문’ 이전의 독립다큐는 그저 그런 자족적인 판타지만을 재생산하는 집단으로 오해받았다. 세간의 시선은 몇 만배 더 강화되어졌다.

앞서 이야기 한 ‘자는 모습’ 이나 ‘진영의 혜택’등은 평론가들의 글쓰기와 말하기 과정에서 특정 작품의 훌륭함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일 게다. 이점에 대해선 평론가들의 선의와 노력, 충분히 이해되고 감사해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한 설명이 자칫 어떤 오해와 선입견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한두 번이 아니라는 것이 낭패. 하루 이틀, 일년 이년에 걸쳐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학적인 평가 대상이든 실천적 연대라는 사회학적인 연구 대상이든 독립다큐가 세상으로부터 온전히 평가받은 기억이 없기에 20년 가까운 시간동안 이 판의 오지랖으로 남아있는 나에게도 평론하는 이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나의 이러한 발언이 자칫 애정으로 비평을 써주시는 분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전제된 시선을 이리 가뭄에 콩 나듯 소통을 하니 서로간의 쌓이는 오해와 불만이 깨질 수가 있겠는가. 답 없는 상황의 반복이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