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기쁜 우리 젊은 날
배창호, 1987
배창호 감독의 아홉번째 작품 <기쁜 우리 젊은 날>은 80년대의 흥행사로 불리우던 감독의 재기작이다. 1982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하여, 일년에 거의 두편씩의 작품을 만들던 그는 <황진이>를 통해 이전 작품들과는 다른 스타일을 추구했으나, 대중적으로 비평적으로도 외면 받았다. 이후 절치부심으로 만든 영화가 <기쁜 우리 젊은 날>이다. 단촐하고 소박한 이야기 속에 롱테이크와 유려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일별되는 장식적인 스타일을 보여준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대중성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카메라의 존재를 드러내고자 했던 배창호 감독의 야심작이었다.
어린 시절 배창호 감독의 영화를 인상적으로 보고, 영화를 공부하면서 다시 봤을 때 든 생각은 이상하리만치 현실도피적이라는 느낌이었다. 격동의 80년대라는 당대의 현실을 외면한 듯한 인물들의 모습은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역동적인 현실의 파고 속에서도 사랑하고 아파하고 어떻게든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항상 존재했다. 배창호 감독은 당대에 일어나는 사건에 집중하고 사회의 표피를 쫓기보다는 묵묵히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서민적 삶의 표본을 담아냈다. 사회 현실을 외면하는 것 같지만 인간의 모습을 담아내려는 이런 작품들은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데, 그는 인물들간의 사랑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희생을 강조하는 삶에 초점을 맞추면서 인간의 모습을 순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것은 매우 일관성이 있고 진실되게 느껴졌다. 다시보면 그의 영화들은 거꾸로 당대의 삶을 반추하게 만드는 반면 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내게 해석됐다. 배창호 감독의 영화는 보는 시점과 시대와 연령대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도 있음을 깨닫게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혼란스러운 고등학생 시절 문득 보게 된 영화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그런 지고지순한 사랑이 존재하는지 생각하게 했고,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 작품이 <기쁜 우리 젊은 날>이었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은 배창호 감독이 꾸준히 추구하는 ‘사랑’이라는 주제와 그리고 전작 <황진이>에서 보여주었던 형식적인 실험이 만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배창호 감독이 시도했던 사랑이라는 주제와 롱 테이크로 불리워지는 형식 미학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주제와 형식이 가장 잘 어우러진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배창호 감독이 비로소 스타일리스트의 경지에 올라간 작품이기도 하다.
첫 장면에서 혜린(황신혜)은 관객을 보고 자기고백을 하는데, 곧 연극임이 드러난다. 바로 다음 컷에서 영민(안성기)이 꽃을 들고 혜린을 보는 모습을 통해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라는 것을 보여준다. 단 두컷으로 이루어진 인상적인 오프닝이다. 배창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영민은 너무도 순수하며 지고지순한 인물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희곡을 쓰며 연극을 꿈꾸는 그는 배창호 감독의 자화상 같기도 하다. 그는 순수한 사랑을 믿는다. 사랑하는 자신을 믿기 때문에 누군가를 그토록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영민은 혜린을 그렇게 끝까지 사랑한다.
사랑에 아파하는 아들을 어루만지는 서민적인 아버지(최불암)의 모습 또한 인상적이며, 아버지의 주변 인물들 역시 영화를 풍부하게 만드는 요소이다. 이렇게 영민의 캐릭터와 주변 인물들의 디테일이 살아있지만, 줄거리는 마치 최근 독립영화를 보는 것처럼 단촐하기만 하고 특정한 사건이 지배하지도 않는다. 의도하지 않게 혜린을 떠나보낸 영민이 취직을 해서 직장에서 무미건조하게 일에 몰두하는 장면은 건조한 요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영민은 미국에서 사랑에 실패하고 돌아온 혜린을 만나 애절한 구애 끝에 결혼을 하지만, 아이를 낳다가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영민에겐 혜린과 비슷한 딸을 남겨둔 채, 비극이지만 비극적이지 않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매우 신파적으로 보이는 드라마 속에서 당대에는 흔히 볼 수 없는 카메라 워크와 미쟝센을 구축하고 있다. 전체 300컷 미만으로 이루어져 컷의 평균 지속시간이 길어졌음에도 지루하거나 고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영민의 구애에 고심하던 혜린이 영민을 바라보는 장면을 창밖에서 잡아 곧바로 아래로 내려가서 영민에게 다가가는 크레인 장면이나, 혜린의 얼굴을 트랙 인 줌 아웃으로 잡은 장면들은 카메라의 존재를 확고하게 느끼게 해주면서, 희한한 감정을 불어넣었다. 미쟝센을 통해 정보를 통제하고 인물의 감정과 동선, 극적 재미를 동시에 추구하는 여러 장면들이 인상깊다.
배창호 감독은 두 번의 실험을 거쳐 배창호 감독 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매우 교과서적이기도 한데, 그만큼 당시엔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것이 한국영화계였다. 모두 새로운 이야기와 화려한 볼거리를 찾고 있는 와중에 배창호 감독은 '사랑'이라는 주제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기본에 몰두하며, 영화라는 원초적인 것을 고민했다.
배창호 감독은 이후 독립적인 방식으로 영화작업을 지속하고 있고, 그의 영화에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인간의 향취가 살아 남아있다. 배창호 감독이 과거의 추억의 감독이 아니라, 현재의 감독으로 기억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런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배창호 감독의 신작을 간절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