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경마장 가는길
장선우, 1991
1990년에 출판된 하일지의 소설을 각색한 장선우의 <경마장 가는 길>(1991)은 공항 출구의 자동문이 열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R의 눈앞에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곳은 R이 공부하러 갔던 프랑스가 아니라 원래 살았던 한국이다. R은 결코 돌아오고 싶지 않았겠지만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곳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한국에서 럭셔리한 나라로 통하는 프랑스에서 무려 박사학위까지 받은 R이지만 그의 현실은 럭셔리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농사를 지어온 부모는 병마에 시달리고 있고, 여동생들은 공장에 다닌다. 아이 둘을 낳은 그의 아내는 교양 따위와는 담을 쌓은 여자이며 이혼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므로 R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시간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면서 자신의 현실을 가리워 줄 판타지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R이 '메흐드'라고 불어로 욕을 할 때, 현실을 외면하려는 그의 심리 상태는 명확하게 드러난다). 아마도 그것은 프랑스에서 3년 반을 같이 살았던 J만이 해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의 J와 한국에서의 J는 동일한 J가 아니다. 한국에서 교수가 되려는 여자가 불륜관계를 지속한다는 건 사회적인 성공을 포기하겠다는 결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1년 만에 한국에서 만난 그들은 처음부터 어긋나기 시작한다. 프랑스에서 부잣집 딸 J는 R의 유학경비를 부담하고 섹스를 허락했고, 가난한 R은 J가 박사학위를 따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그들의 교환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 프랑스 박사에 문학평론가가 된 J에게 R이 교환가치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 R은 J에게 섹스만을 원하는데, J는 R이 원하는 걸 섹스만 빼고 다 해준다. R에게 J와의 섹스는 판타지를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통로일 터인데, 그의 욕망은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심지어 간신히 기회를 잡았을 때는 잘 되지 않기까지 한다. 경마장을 계속 돌고 도는 말들처럼, 그들이 섹스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상황은 비슷하게 반복되면서 점점 더 나빠진다.
J는 말한다. '한국이 어떤 나라인줄 아세요?' 이 영화에서 R과 J의 장면만큼이나 흥미로운 대목은 그들의 눈에 비친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십자가로 뒤덮힌 서울의 밤은 공동묘지 같고, 대낮의 거리에는 멸공을 외치는 자동차가 질주한다. 사람들은 술에 쩔어 비틀거리고, 한가로웠던 산책은 고된 노동이 된다. 집사고 애 키우다 인생을 낭비하는 그런 곳이다..... 말하자면 한국은 살 만한 곳이기는 커녕 일종의 지옥이다.
R은 J에게 3천만 원을 요구하고, 협박하고, 매매춘까지 제안하면서 지옥을 견디게 할 불가능한 판타지에 끝까지 매달린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행동하는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치사하고 야비한 면모를 드러낼 뿐이다. 그는 J에게 그 가짜들을 갖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걱정하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실재를 보지는 못한다. 결국 J와의 관계가 완전히 끝장이 나고, R은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 우연히 차창 밖으로 남루한 차림의 두 여인을 보게 된다. 그가 감전당한 듯 그들에게서 고통스러운 삶의 무게를 볼 때, 영화의 첫 장면이 반복되고 버스의 창문으로 R의 눈물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판타지를 포기하고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이 장면은 <태백산맥>에서 송화의 굿거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장면이나 <바보선언>에서 동철과 육덕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춤추는 장면 또는 <장마>에서 엄마가 아들의 사망을 확인하는 장면과 함께 볼 때마다 심금을 울린다. 포스트모던 소설로 평가받는 원작에서 장선우는 ''''''''''''''''진정성''''''''''''''''의 순간을 발견해낸다. 적어도 이 장면만큼은 원작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다. 이 마지막 장면이 없었다면 <경마장 가는 길>은 남녀관계의 실재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한국사회의 풍경을 날카롭게 포착한 영화 정도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또는 본격적인 속물의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예고편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훌륭하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볼 때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진정성의 이미지''''''''''''''''를 마주하는 즐거움은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