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신풍객
이상구, 1976
1970년대 중반. 죽은 이소룡의 뒤를 이어 수많은 짝퉁 이소룡들과 소림사 무술승들이 구사하는 비기의 무술 열풍이 극장가를 휩쓸었다. 한국액션영화의 터줏대감으로 60년대부터 군림하던 깡패 영화는 김두한 시리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홍콩 쿵푸 영화를 닮으려는 한국 쿵푸 영화들에게 밀려 난다. 당시 극장가의 대세는 홍콩 쿵푸 영화와 그것을 닮으려는 한국 쿵푸 영화들이었다. 이 와중에 소리 소문 없이 개봉되었다가 사라진 영화가 있다. 그 영화가 바로 김희라 주연, 윤삼육 시나리오, 이상구 감독의 1976년작 <신풍객>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산만한 덩치에 덥수룩한 수염. 눈이 부리부리한 사내가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싸움에 진적이 없다는 이 사내는 싸움꾼을 고용하기 위해 촌에서 올라온 초라한 행색의 촌부들 앞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술과 고기, 밥으로 배를 채운다. 촌부들은 이 사내가 진짜 샐까 의심하며 지켜보는데, 사내는 그 많은 술과 음식을 먹고 나서 “자! 이제 힘 좀 써 볼까” 하며 벌떡 일어나 절구통을 번쩍 들어 한방에 깨뜨리는 괴력을 과시한다. 감탄한 촌부들은 그를 당장 고용하고 의기양양한 사내는 그가 대적할 상대와 만나는데, 그들은 일본에서 신라시대의 유물을 도굴하는 도굴꾼들이 고용한 일본 무술가들이다. 안타깝게도 괴력의 사나이는 유도가에게 잡히는 순간 한방에 나가떨어진다. 촌부들이 사는 이 마을은 신라시대 왕들의 무덤이 많기로 소문난 곳. 이곳에 일본 도굴꾼들이 일본순사와 결탁하여 그들이 고용한 야쿠자와 무술가를 데리고 신라유물을 약탈하고, 마을을 폭력으로 휘어잡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일본인들을 물리칠 조선의 협객을 간절하게 원하지만, 그들이 돈을 주고 사온 조선의 내노라하는 왈짜패들은 일본 무술가들에게 한방에 나가떨어져 걸음아 날 살려하고 내빼는 것이다. 그런 와중. 서울의 어느 단칸방 안. 늙은 기생의 치마폭에 휩싸여 먹고 자고, 술 먹고, 섹스 하는 일에만 열심인 한심한 왈짜패 사내가 있다. 이 사내는 화류계 계집 품에서 노는 것만이 사내가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소일거리라 킬킬거리며 말하지만, 사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경상도 어느 곳에서 힘쓸 일. 즉 싸움질할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 동안 싸움질을 안 하고 어떻게 참았는지 가지 말라고 우는 계집에게 눈길 한번 안주고 이번에는 어떤 놈을 늘씬하게 패주려나. 하며 희희낙락 길을 떠난다. 여자도 안다. 자신의 치마 자락 속에서 놀 때 그가 했던 말은 모두 거짓말이란 것을. 죽지 않고 다시 돌아오기만 바랄뿐. 뭐 이 장사 한두 번 해보고. 저런 사내 한두 번 겪어보았나 하며 멀어지는 사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힘차게 코를 팽하고 풀고 치맛자락을 휘감아 또 다른 손님을 맞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 단장을 한다. 계집의 향기로운 품과 따뜻한 아랫목을 떠나 추위에 몸을 움츠리고 길을 떠나는 사내. 마을에 들어선 사내. 먼 길을 오느라 배는 고프고, 감기 기운까지 겹쳐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조선 최고의 싸움꾼임을 자처하던 왈짜패들에게 많이 속은 터라 행색이 초라한 사내에게 눈길하나 안준다. 게다가 재수가 없으려 그랬는지,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어 숟가락을 들 힘도 없는 김희라 앞에 일본이 무술가와 야쿠자들이 나타나고, 사내, 무참하게 얻어터지고 쫓겨난다. 형편없이 얻어 터지고 좇겨난 사내. 이전의 왈짜패들과는 뭔가가 다르다. 그는 너무나 좋아하고 있다. “야! 이거이거 온 힘을 다해 싸움질할 놈들이 생겼어. 약하면 어저나 걱정 했는데 너무 센 놈들이라 나는 너무 기뻐” 이렇게 유머러스하고, 기운이 넘치는 조선 왈짜패를 누가 연기하겠는가? 그때나 지금이나 조선 왈짜패는 김희라. 단 한명밖에는 연기할 자가 없다. 김동리의 소설. ‘황토기’에 등장하는 두 명의 사내가 있다. 태어나길 싸움만으로 먹고 살게 태어났는데. 도무지 힘쓸 일이 없는 사내들. <신풍객>에서의 김희라는 소설 ‘황토기’속의 사내가 분명하다. 이 영화는 홍콩 영화를 닮으려던 수많은 한국 쿵푸 영화들 속에서 빛나는 한편이다. 시나리오 작가 윤삼육이 홍명회의 ‘임꺽정’에서나 볼 수 있었던 조선 협객을 영화 속에 그리려는 야심이 곳곳에서 넘쳐 나고, 김희라는 조선의 영웅호걸이 지닌 유유자적과 호탕함이 넘쳐나고 게다가 이런 곳 밖에는 힘을 쓸 수 없는 나라 잃은 싸움꾼 사내들의 비애까지 표현한다. 70년대 중반 가장 흥미로운 한국 액션 영화를 고르라하면 이두용 감독의 태권도 영화들과 김희라 주연의 <신풍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