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신상옥, 1961
고백하지 못한 사랑, 그래서 가슴 깊이 가라앉은 그리움. 사랑은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왜 사랑해선 안돼는 걸까? 가족제도와 결혼제도가 억압하는 개인의 정서적 삶, 그에 따른 사회적 시선의 따가움....이 모든 앙금을 어린이의 시각에서 풀어내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 신상옥)는 서늘한 목가적인 흑백 풍경화로 다가온다. 주로 사극과 강력한 남성영웅담을 그려냈던 신상옥 작품세계에서 이 작품은 가장 부드럽고 서정적인 방식으로 내면풍경화를 그려낸 수작이다.
여섯 살짜리 옥희의 깜찍하고 귀여운 목소리로 영화가 열린다. 그 목소리를 타고 어린이 그림 특유의 자유분방함이 뻗어 나오는 이미지를 통해 가족구성원이 소개된다. 어머니와 식모아줌마, 그리고 집에 자주 들리는 할머니..그러니까 옥희까지 포함해 세 여자가 사는 조용한 한옥이 사랑방 손님을 맞는 무대이다.
외삼촌이 데려 온 아저씨는 화가이자 미술교사로 옥희네 사랑방에 하숙을 하게 된다. 유복녀로 태어난 옥희에게 아저씨는 반가운 손님이자 아버지같은 다정한 어른 친구이다. 엄마방과 사랑방을 오가며 메신저 노릇을 하는 옥희에겐 아저씨와 노는 게 일상의 즐거움이 돼버린다. 아저씨가 삶은 계란을 좋아한다는 옥희의 말은 엄마가 아저씨에게 갖는 호감을 계란 반찬으로 표현하게 해주기도 한다.
정기적으로 계란을 두어꾸러미 들이면서 홀아비 계란장수와 과부 식모아줌마 사이에 연애담이 이루어져 결혼으로까지 진전된다. 조역인 이 둘의 애정담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방자와 향단이의 사랑놀이같은 구실을 한다. 곁가지 사랑놀이가 주인공의 사랑과 병행되는 <춘향전>식 극적효과는 이 작품에선 발생돼지 않는다. 그보다는 식모 아줌마의 임신으로 사랑방 손님이 의심을 사고 결국 사랑방을 떠나게 되는 전초전으로 작동한다.
사랑방 손님과 엄마 사이에는 제대로 맞대면조차 못하는 공기같은 억압, 혹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거리를 두거나 모른척 고개를 돌려야 하는 남녀유별 예법이 강력하게 자리한다. 영화의 원작인 주요섭의 <사랑손님과 어머니>가 영화화 훨씬 이전인 1935년인걸 참조하면 남녀부동석이란 봉건적 규율의 강압적 분위기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이를테면 예배당의 자리도 남녀가 따로 돼있고, 홀로 된 여자들의 수절과부 정신이 미덕으로 찬양되는 봉건적 공기를 시어머니와의 대화에서 느낄 수도 있다.
엄마가 오랜만에 시내로 나가 옛 친구를 만나 쪽지고 한복 입은 모습을 지적당하며 양장도 하고 머리도 자르라는 조언을 듣는다. 겉모습부터 탈봉건화 하라는 친구의 권유에 그녀는 잠시 흔들린다. 무엇보다 일찍이 남편을 여읜 그녀에게 다가온 사랑방 손님이 사랑하는 존재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둘 사이의 사랑은 봉건적 억압과 눈치보기 속에서도 아주 잠시 열정적으로 폭발한다. 옥희가 하얀 거짓말로 아저씨가 준 것이라며 전해준 꽃다발을 받은 엄마는 억압된 감정을 홀로 드러낸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후 잠궈 둔 피아노를 첨으로 열고 격정적 연주를 하는데, 그 위엔 꽃이 놓여있다. 매을 물을 주던 꽃이 시들자 그걸 찬송가 속에 마른 꽃으로 간직하는 모습까지 카메라는 세세히 따라잡는다. 이 부분에서 그녀의 격정과 억압의 충돌은 대각선으로 기울인 구도 속에서 미세한 표정을 잡아내는 쇼트들을 통해 펼쳐진다. 그녀에 대한 사랑방 손님의 연모의 정은 그녀를 그려낸 초상화를 비롯하여 사랑고백이 담긴 편지, 마침내 우물가의 포옹으로 폭발한다.
이렇듯 서로에 대한 연모의 정을 숨기며 앓다가 결국 헤어지는 둘의 관계는 옥희의 중개덕에 중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말에 이르러, 모녀가 마을 뒷산에 올라 사랑방 손님이 탄 기차가 저멀리 사라지는 풍경을 바라보는 모습은 오랜 여운을 남겨준다. 거기 새겨지는 슬픔은 사랑의 억압 속에 앙금처럼 내려앉는 눈물어린 시선으로 화면을 압도한다. 내면을 감추면서도 어쩔 수 없이 슬쩍 드러내는 김진규-최은희의 섬세한 연기 조화는 깜찍한 옥희의 내래이션을 통해 저릿한 유머효과를 전해준다. 그런 반어법적인 서사 전개는 영화보기의 감출 맛을 전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