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나에게 오라
김영빈, 1996
김영빈의 <나에게 오라> 하면 떠오르는 것은, 최민수가 연기하는 정석이라는 전라도 시골 지역의 전설적인 깡패가 도박판에서 상대 패거리들의 습격을 받아 몸이 만신창이가 되는 영화 후반부의 한 장면이다. 그 장면은 <테러리스트>로 충무로 액션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김영빈 감독의 토착적인 데 뿌리를 둔 액션 아이디어가 박력있게 만개하는 장면이었다. 요컨대, 나는 그렇게 좁은 한국식 가옥 방안 공간에서 거두절미하고 몇 개의 커트로 붙여버린 사내들의 싸움을 한국영화에서 본 적이 없었다. 한 순간의 방심때문에 남은 생을 불구로 살아야 할 치명적 내상을 초래하는, 겉모습만 으스대는 사내의 허망한 최후를 목격하게 해 주는 장면이었다.
그렇다고 <나에게 오라>가 액션영화인 것도, 최민수가 연기한 정석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것도 아니다. 최민수는 특별 출연에 가까웠다. 그가 연기하는 정석은 박상민이 연기하는 주인공 춘근이 흠모하는 인물이다. 춘근은 일자무식 집안에서 태어나 공부도 제대로 못 했고 깡패로 한 번 먹고 살겠다고 작정한 놈이다. 서울에 올라갔다가 별 볼일 없이 귀향한 이 무지랭이 청년은 변변히 잘 거처도 없이 시골 역전 근처를 떠돈다. 시장 근처에서 대충 노숙하며 일어난 그가 1970년대 당시 시골 아침에 울려 퍼지던 새마을 노래에 맞춰 ‘새벽 X 이 꼴렸네. 너도 나도 일어나 XXX를 칩시다”란 육두문자로 개사한 노래를 따라 부르며 오늘 하루 무슨 일을 저지를까 궁리중일 때 이 영화의 정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마초 코드로 청춘을 통과하는 이들의 마음 속 바닥을 보여줄 것임을 예감하게 되는 것이다.
춘근과 달리 공부 잘 하는 모범생인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윤호는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았으나 서울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가 몰래 고향에 내려온다. 아비 없는 자식이란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그는 청춘기의 심장을 자학으로 채우려 한다. 그는 춘근의 졸개를 자처하며 마초 어른 흉내를 내는 춘근의 뒤치다꺼리를 한다. 이 어리석은 두 꼬마 마초들을 감싸는 것은 그들만큼 어리석고 무지막지한 시대의 기운이다. 영화에는 이런 에피소드도 끼어든다. 영화배우가 되겠다며 고향후배들 앞에서 출정 선언 비슷한 걸 하는 춘근의 어느 선배는 서울에 갔다가 별 볼 일 없이 돌아온 후 시골 아낙네들에게 미국 포르노를 영사기로 틀어주며 그래도 예술은 살아있다고 자기기만의 환상을 놓지 않는다. 정석의 에피소드는 더 통렬하다. 춘근과 윤호의 우상인 정석은 그래봤자 삼류 깡패 주제에 주색을 즐기면서 난을 치는 풍류객 놀이에 빠져 있다. 그러나 시골 마을에까지 스며든 정치권력의 세력판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 채 신흥세력에게 린치당하고 꼬마 건달들의 우상 자리에서도 퇴각당한다.
마초들의 퇴행적이고 자기파괴적인 행동들의 극단이 유신 시대 전라도 시골 마을의 공기와 적절하게 부응하는 것은 김영빈 감독 또래 세대의 경험적인 성찰이 배어있는 것이다. 반면, 이 영화의 지독한 남성중심적 환상이 관철되는 여성의 대상화는 송기원의 원작 소설에도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의 정서를 편벽되게 만드는 결정적 흠집으로 남는다. 남성 자신의 결핍을 메워주는 어머니이자 창부인 이상향으로서의 여성상을 이 영화는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그리워하며 스크린에 현실인 것처럼 구현시킨다. 여자의 자궁 속에서 끝장을 보려는 듯 달려들었다가 결국 그녀들을 파멸시키며 비겁하게 도망치는 남자들을 향해 영화 속의 여성들은 끝내 구원의 손길을 거두지 않는다. 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인 남성적 환상에로의 퇴행이 이 영화를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이게 한다. 그렇다 해도 불우한 당대의 시대적 공기를 남성 캐릭터들의 면면과 시골 공간에 배어나게 한 김영빈의 연출력은 감독으로서의 그의 경력이 짧게 끝난 것을 아쉽게 여기게 한다. 영화 클라이맥스에 펼쳐지는 시골 들판에서의 불놀이 장면은 무엇을, 누구를 겨냥하고 싸워야 할지 조차도 몰랐던 무지한 남성마초들의 모험담의 종착지로 부족할 게 없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무지한 아이들은 불나방처럼 날개짓하다가 헛되게 자기 자신들을 망친다. 어떤 삶이 그들에게 바람직한 형태로 남아있었을까. 그들은 답을 몰랐고 영화를 보는 우리도 쉽게 답하지 못한다. 적어도 나같은 관객은 그랬다. 이 영화가 흥행하지 못한 것은 사필귀정일 수도 있으나 이 영화가 기억되지 못하는 것은 많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