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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로맨스그레이

신상옥, 1963

[한국영화걸작선]로맨스그레이 대표 이미지

영화사에서 <로맨스그레이>(1963, 임희재 극본, 신상옥 연출)는 3년 전의 <로맨스 빠빠>(1960)년부터 시작한 1960년대 초의 가족멜로드라마, 특히 ‘김승호 영화’라고 통칭되는 아버지 중심의 가족멜로드라마의 한 작품으로 포함되어 서술된다. 그래서 제목 작명과 코미디라는 설정, 연출자인 신상옥 감독, 아버지 역의 주연배우 김승호에 이르기까지, 이 작품은 흔히 <로맨스 빠빠>의 아류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이런 판단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나, <로맨스그레이>를 <로맨스 빠빠>의 뒤편에만 밀어 넣어 두기에는 좀 아깝다. 작품의 얼개가 <로맨스 빠빠>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튼튼하게 잘 만들어진 작품일 뿐만 아니라, 1960년대 초를 살짝 벗어난 지점에서 엿보이는 변화가 주목할 만하기 때문이다. 

<로맨스 빠빠>와 <로맨스그레이>는 모두 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이다. 방송극 <로맨스그레이>는 1962년 임희재 작, 민구 연출의 문화방송 라디오드라마로, 토요일과 일요일 밤에 방송되던 주말드라마였다. <로맨스 빠빠>에 비해 <로맨스그레이>가 훨씬 복잡하고 튼튼한 얼개를 지니고 있는 까닭은 라디오드라마의 원작이 각기 다른 콘셉트의 작품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드라마 대본이 남아있지 않아 확언하기는 힘들지만 드라마 <로맨스 빠빠>는 회별로 에피소드가 완결되는 이른바 시추에이션드라마임에 비해, <로맨스그레이>는 리메이크 영화나 드라마 시간대 편성 등을 미루어 볼때 줄거리가 이어지는 연속극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로맨스 빠빠>가 갈등의 진행보다는 서울 중산층의 일상생활을 펼쳐놓는 것에 치중하는 것에 비해, <로맨스그레이>는 처음부터 품격 있는 교수 아버지의 불륜이라는 극적 갈등을 설정하고 이를 전개하는 방식을 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교양 있는 부인에 대졸자 자녀까지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도시 부유층인 교수는 바걸 만자와 딴 살림까지 차릴 정도로 심각한 외도에 푹 빠져 있다. 여기에 김사장과 가정교사 출신의 애첩 보영의 외도 이야기가 서브플롯으로 얽혀 있다. 만자와 보영은 친구 사이이고, 보영은 교수의 장남이 대학시절 연정을 느꼈던 동창생 사이, 교수 부인과 김사장 부인은 같은 사교 모임 멤버이다. 만자는 아파트를 얻겠다며 교수를 졸라 얻어낸 돈을 전 남편인 건달에게 뜯긴 후, 김사장이 보영을 위해 얻어준 아파트를 교수와의 밀회 때마다 자신의 아파트인 양 빌려 쓰기로 약속한다. 방 하나를 두고 각기 다른 커플이 정사 약속을 한다는 설정은, 잘 짜인 구성의 재미로 밀고 나가는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적인 설정 중의 하나이다. 

김사장 부인이 사교모임에서 남편의 외도를 하소연한 것을 계기로, 그 사교모임은 리더인 교수 부인을 앞세워 보영의 아파트로 쳐들어가 살림을 부수고,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교수와 만자의 불륜이 들통 난다. 남편의 외도가 아내의 잘못이라고 큰소리쳤던 교수 부인은 창피함을 견디지 못하고, 남편인 교수를 데리고 나가 한강에서 함께 자살하자고 물에 빠뜨리고, 이를 안 자녀들이 따라와 상황을 수습함으로써 가정의 갈등은 해결된다. 

아주 잘 짜인 구성에, 심심치 않은 만큼 잘 배치된 코믹한 장면들이 빛나는데, 이는 인물들의 형상화가 아주 선명하고 생생하기 때문이다. 특히 맏며느리나 맏딸 분위기를 도맡았던 신필름의 간판 여배우 최은희가, 진한 화장에 입가의 점까지 찍고 야한 속치마 바람으로 드세게 설쳐대는 바걸을 연기했는데, 최은희의 연기력과 더불어 숨겨진 관능성과 매력이 넘쳐흐른다. 

<로맨스 빠빠>에 비해 덜 건전한 것도 이 작품의 특성으로 주목해 봐야할 지점이다. <로맨스 빠빠>는 1960년을 전후한 시기,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서양적 근대성에 대한 낙관성이, 민주적 근대성을 체화한 한국 중산층 가정의 형상을 통해 나타난 작품이었다. 아버지는 포용력 있고 어머니는 현모양처이며 자녀들은 독립적이며 발랄하니, 늙어가는 아버지에게 닥친 위기쯤이야 쉽게 해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를 연 4?19와 5?16의 사회적 충격이 조금 가라앉을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까지, 이런 낙관성과 건전함이 늘 지속될 수는 없는 법이다. 한국의 중년 남자들은 딸 같은 여자들을 애첩으로 거느리는 예전 버릇을 버리지 않고 있었을 것이니, 건전함에 대한 강박이 사라진 후 이를 포착한 현실적 작품이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게다가 주목할 만한 것은 아내 인물형의 변화이다. 교수 부인의 설교에서 나타나듯 1960년대는, 한편으로 현모양처 이데올로기를 통해 여성들을 가정에 묶어두는 사회적 노력이 경주되었던 시대인 동시에, 이미 1950년대의 ‘미국바람’을 통해 욕망을 확인한 여성들이 가정 내에서나마 주도권을 차지하고 싶어 하며 ‘엄처’ 노릇을 노골화하는 시대였다. 콧수염 깎는 일까지 엄처의 눈치를 보는 교수, 첩살림을 때려 부수러 몰려다니는 중년 아내들의 사교모임 등은, 1960년대 <로맨스 빠빠>의 건전함으로부터 조금씩 일탈하기 시작하여 1960년대 중반으로 향하고 있던 이 시대의 흔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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