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삼포가는 길
이만희, 1975
정씨(김진규)와 노영달(백일섭)과 백화(문숙). 하얀 눈 위에서 만난 세 사람은 서로 아웅다웅 하면서 정처없는 길을 떠난다. <삼포 가는 길>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내겐 인물들에 관한 영화였다. 소설 속 글로 표현된 내용들이 인물들의 구어체 대사로 표현되면서 생동감있는 드라마가 눈앞에 펼쳐지는 경험이었다. 때문에 더욱 리얼하게 느껴졌고, 시대의 아픔과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상처가 가슴 깊게 각인된 영화였다.
특히 백화라는 인물은 보기 드물게 살아있는 캐릭터였다.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어린 나이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 작부의 포스를 느끼게 했다. 거리에서 만난 낯선 남자들에게 한치의 물러섬도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한마디도 지지 않는 백화는 갓 스무살이지만 거친 풍파 속에 스스로를 지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화류계 여자의 강한 풍모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혹 남자의 완력이 가해질라치면 익살스런 애교로 남자의 너털 웃음을 끌어내는 능숙함은 팜므파탈을 흉내내는 여느 캐릭터가 보여줄 수 없는 담백함을 표현한다. 백화를 연기한 문숙의 연기 또한 두말할 필요없이 발군이라 할만하다. 나중에야 그녀가 이만희 감독과 연인 사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 그렇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감독과 연기자가 서로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 작품에 얼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가. 그녀가 내뱉는 ''''''''''''''''그게 어디 내 잘못인가요?''''''''''''''''라는 말에는 스스로의 삶을 비관하지 않으려는 당당함이 묻어나며, 개인의 힘으로 어쩔 도리없는 사회적 상황이 드러난다.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어디 그들만의 잘못이겠는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무소에서 10년을 살다 나온 정씨의 표정 역시 선함과 동시에 묵직함과 단호함을 품은 얼굴이다. 상대의 말투와 표정 만으로 살아온 과정을 짚어낼 수 있는 삶의 무게가 그의 얼굴에서 느껴진다. 백화의 아버지 행세를 하는 장면에서는 백화 스스로도 그를 아버지라 여길 정도이며, 실제 아버지라고 느낄만한 풍모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거칠게 살아온 뜨내기 노동자이지만 남의 장례식장에서 태연하게 울어제낄 만큼 넉살좋은 뻔뻔함과 과거에 잘나갔다고 허풍을 떠는 영달 역시 마음 한구석에 깊은 상처와 간여림을 갖고 있다. 백화와의 하룻밤 후 살림을 차리자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며 백화를 떠나보내는 그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 잘 아는 나약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인한 노동자이지만 남자로서는 용기없는 모습은 그를 다중적 캐릭터로 만든다. 이렇게 뜨내기 세 인물이 커다란 사건없이 영화를 이끌어간다.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 속 인물들의 표정에서 그들의 아픔과 상처와 성격이 드러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최근 영화에선 이렇게 존재 자체에서 절실함이 묻어있는 캐릭터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점은 매우 아쉽다. 물론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원작의 힘에 빚진 부분이 있겠지만, <삼포 가는 길>은 문학적 인물을 영화 속에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어낸 가장 성공적인 사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인물들의 표정과 연기 이외에도 <삼포 가는 길>에는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광활한 눈밭을 걸어가는 세 인물을 익스트림 롱 샷으로 잡아낸 장면에서는 갈 곳 없는 뜨내기 군상들의 고립감이 드러난다. 아무도 그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그들이 머물 곳은 그 넓은 벌판에 아무 곳도 없다. 백화와 헤어졌다가 흉가에서 다시 만난 세 인물들이 모닥불을 피워놓고 옷을 말리는 장면에서는 훈훈함과 온화함. 갈등과 화해 속에 드러나는 상처와 고독이 보여진다. 백화와 영달이 싸울 때 먼발치에서 보이는 쥐불놀이 불빛의 은은함은 절대 꺼질 것 같지 않은 민초들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한적한 산골이지만 마을 곳곳은 이미 공사중인 장소가 많다. 1970년대 불어닥치기 시작한 개발의 광풍이 영화를 통해 은연중에 드러난다. 또하나 인상적인 장면은 영달이 바위산을 뚫는 공사현장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장면이다. 1970년대 경제개발의 가운데는 이런 뜨내기들의 강인한 노동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바위산 위에서 착암기를 사용하는 노동자의 실루엣은 잠깐이지만 노동의 숭고함과 노동자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영달이 과거를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전혀 다르게 전개되는 플레쉬 백의 활용도 인상적이다. 상대가 듣는 내용과 반대되는 영달의 회상이 겹쳐지면서 영달의 상황을 더욱 절박하게 만든다. 또한 사운드와 음악의 사용도 세련되고 현란한데, 음악으로 감정을 이어가다가도 문득 사운드를 무음으로 처리하면서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울림을 크게 만든다. 사운드를 적절히 활용하면서 인물의 상황과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을 손쉽게 드러내는 방법도 당시로는 흔치 않은 기법이었다.
이만희 감독은 이 영화의 후반작업 중에 간경변으로 병원으로 실려갔으며, 병원에서도 편집실을 오가면서 영화의 완성을 위해 애썼다고 한다. 영화는 그가 명을 달리하고 한달 후에 극장에서 개봉했다. 때문에 다소 미완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장면이 있다. 백화는 살림을 차리길 바라고, 영달은 빈털터리인 자신이 떠날 수 밖에 없음을 아는 기차역 장면은 정지화면처럼 촬영됐다. 기다리는 백화의 얼굴. 기차표를 전해주는 정씨와 영달의 손. 멈춘 정씨의 얼굴. 울먹이는 노영달. 하지만 영화 속 장면은 멈추지 않고 어색한 테이크로 잡혀있다. 결정적 장면들이 정지화면으로 잡혔다면 영화의 울림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리고 최근 복원된 엔딩 버전에서 정씨가 탄 버스가 남해대교를 건넌다. 백화가 기차역에서 다방을 바라보며 묘한 표정을 짓는 장면에서 끝을 맺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만희 감독의 디렉터스 컷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 영화의 묘미는 세 명의 주연배우들이 펼치는 연기의 향연에 있다. 삶의 흔적을 느끼게 만드는 구어체의 대사와 인물들의 표정은 그 자체로 드라마를 생성시킨다. 눈밭을 걷거나 누워있는 세 인물을 잡은 롱 샷들은 설원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세 인물을 단단히 묶어주는 기능을 한다. 넓은 벌판에서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정작 갈 곳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허허롭게 담아낸다. 눈길 여행을 통해 뭉쳤던 세 인물은 결국 뿔뿔히 흩어지고 만다. 그렇지만 그들의 여행은 강한 삶의 의지를 간직한, 사람 냄새 물씬 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