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애니메이션이 황금알을 대하는 몇 가지 예
“애니메이션 ‘산업’이 황금알을 낳는다”는 말은 더이상 솔깃하지 않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황금알을 낳지 않는다”라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황금알 여부를 떠나, 애니메이션이 과연 알 자체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극단적인 비관론도 있다. 이런 진부한 논쟁을 정리하려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산업을 꼼꼼히, 냉정하게 따져봐야 하지만, 각 진영의 논거를 뒷받침할 만큼 정확하고 투명한 (게다가 솔직하기까지 한) 데이터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아서, 산업의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 애니메이션을 둘러싼 모든 이들은 일대 패닉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장밋빛 전망을 믿는 이들이건, 예술의 고단함을 감내하는 이들이건, 애니메이션은 무언가를 약속해야 한다.
이번 칼럼은 산업의 실체를 (여전히 진부하게 되풀이하여)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고부가가치 성장동력 지식/창의산업이여, 문화를 융성케 하라, 비비디바비디붑!”이라는 주술의 약빨을 논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서 황금알이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그러니까,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장 위를 산책하려는 글이다.
첫 번째 작품은 찰리 보워스Charley Bowers라는 코미디언이 1930년에 만든 <잇츠 어 버드It’s a Bird>(위 사진)다. 사업 욕심이 가득한 한 사내가 ‘쇠를 먹는 새’를 찾아낸다. 새는 기꺼이 사내 앞에서 꿀꺽꿀꺽 쇠 쪼가리들을 먹어치우고는 알을 하나 낳는다. 급하게 부화시킨 알에서 나온 조그만 금속 덩어리는 점점 커지면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 마침내는 근사한 자동차로 완성된다, 와우~! 지금 봐도 꽤나 근사한, 트랜스포머의 원형을 보는 듯한 장관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내는 대박 사업 아이템이라며 동업을 권한다. 고철 덩어리만 먹여주면 그 어떤 생산 설비 없이도 차를 뽑아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다. 그러자 새가 한마디 던진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는 저런 알을 100년에 한 번 낳는다, 깔깔깔!” 그렇다, 황금알을 낳기는 하는데 매일, 매번이 아니라 100년에 한 번이다. 잘 새겨두자.

앨리스의 달걀 공장Alice’s Egg Plant (1925)
두 번째 작품은 황금알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월트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 시리즈 ‘앨리스 코미디Alice Comedies’ 중에서 <앨리스의 달걀 공장Alice’s Egg Plant> (1925)이다. 이재에 밝은 소녀이자 농장주 앨리스는 대량 주문에 한껏 들떴있다. 그러나 암탉들은 고된 할당량과 사생활 통제에 불만을 품었고, 때마침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잠입한 붉은 암탉스키 (Little Red Henski)가 총파업을 유도한다. 발주 물량을 채우기 위해 앨리스는 나름의 묘안을 떠올린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수탉에게 권투 경기를 주선하고, 입장료로 달걀 하나를 받기로 한 것이다. 파업 중이던 노동자 닭들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며 즐거운 볼거리를 소비하였고, 그 덕에 앨리스는 주문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디즈니의 노동관이나 정치관을 둘러싼 논쟁을 떠나서 (사실 이 작품은 30년대 디즈니 스튜디오의 대량 해고 사태나, 할리우드에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에 동조하던 후기 월트 디즈니의 태도에 비하면 순진한 편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얼마 안 된 그가 애니메이션을 노동자의 지친 일상에서 소비될 수 있는 대중 오락 상품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황금알은 대중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을 때 비로소 교환,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미키 마우스의 정치적 전복성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이 작품도 봤다면 훨씬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을 테다) 트럭 가득 실린 달걀이 다 떨어져 깨진다는 결말은 덤이다.

보캉송의 ‘기계 오리’ (1739)
세 번째 경우는 영화가 탄생하기 한 세기 반 전, 1739년에 발표되었다는 기계 오리이다. 오토마타의 전설인 보캉송Vaucanson이 만들어낸 이 기계 오리는 당시 세인의 주목을 한껏 받은 경이로운 설치물이었다. 일반적인 오토마타가 외양과 동작을 흉내 내는 정도인 데 비해, 이 기계 오리는 ‘관람객’이 주는 음식물을 받아 먹고 소화 시켜 배설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계 오리의 ‘알’이 아니라 ‘응가’에 열광한 것이다 (그래도 기계 오리는 구리판 겉면에 금박을 입힌 ‘황금 오리’였다). 물론 기계 오리의 배설물은 실제 똥이 아니라, 인공 모조품이었다. 대부분의 마술쇼가 그러하듯, 사람들은 마술쇼 자체를 즐길 뿐 아니라, 그 트릭의 원리가 밝혀진 후에도 여전히 그 즐거움을 유지한다. 먹고 싸는 오토마타 오리가 세인에게 어필한 사실은 단지 실제의 모사/복제/흉내가 아니라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가 직접 주는 먹이를 받아먹을 줄만 안다면, 그 결과물이 똥이든, 알이든, 실제이든, 모사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위의 세 사례들 중 어떠한 황금알에 집중하고 원하는지에 따라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것은 산업적 회의론보다는 여전히 황금알을 좇는 이들의 발언이다. ‘정말 그렇다고 믿고 있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도 장담 못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건가’, 내심 궁금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거기에는 꽤나 근사한 퍼포먼스가 가미되어야 한다. 적어도 마술사는 마술쇼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모두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붙잡아 두는misdirecting 퍼포먼스의 숙련도와 쇼맨십이 필요하다. 20년 전부터 되내던 주술과 주문 말고, 좀 더 그럴싸한 황금알 시전이 나와줘야 구경할 맛이 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