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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장마

유현목, 1979

[한국영화걸작선]장마 대표 이미지

<장마>는 유현목 감독의 마지막 걸작이다. 이후 <사람의 아들>을 비롯해 두 편의 영화를 더 찍었지만, 이 영화보다 더 낫다고 하기는 어렵다. 윤흥길의 원작을 각색한 <장마>는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분단영화’이다. 이 영화는 박정희 정권 말기인 1979년에 제작되었는데 그럼에도 빨갱이의 만행을 고발하는 대신,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빚어진 민족의 적대관계를 치유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월남한 실향민이었고 일련의 ‘반공영화’를 연출했던 유현목 감독이 남북의 대립에서 화해로 나아가는 영화를 연출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전쟁 동안 동만의 외가 식구들이 서울에서 피난을 오면서, 사돈지간의 두 가족이 함께 살게 된다. 그러다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우익으로 활동했던 외할머니의 아들 길준이 국군에 소대장으로 자원입대를 한다. 친할머니의 아들 순철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완장을 차고 나대다 국군에 쫓겨 건지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사이가 돈독했던 두 할머니는 자신의 아들의 무사귀환을 빌며 상대방을 저주하기 시작한다. 길준이 전사하면서, 그들의 갈등은 점점 더 커져만 간다.

길준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는 대목은 유현목의 연출과 유영길의 촬영이 어우러진 명장면이다. 동만의 외할머니는 낮잠을 자다 이빨 빠진 꿈을 꾸고 나서 외아들의 죽음을 예견한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도 꿈을 통해 미리 알았다고 하면서, ‘곧 소식이 올 것’이라는 말을 주술처럼 계속 절망적으로 중얼거린다. 장대비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내리치고 개짓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무시무시한 밤, 바람에 호롱불까지 꺼져 캄캄한 가운데, 외할머니는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쉴 새 없이 완두콩을 까며 아들의 죽음을 예언한다. 그리고 마침내 길준의 전사 소식을 알리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동만의 엄마가 통곡을 하고 나머지 식구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 상황에서도 아들을 잃은 외할머니는 미동도 없이, 단 한 방울의 눈물도 없이, 계속 완두콩을 까며,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을 실성한 듯 반복한다. 자식을 잃은 어미가 무표정하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할 때, 어떤 통곡에서보다 더 한 슬픔이 밀려온다.

이 영화의 또 다른 백미는 순철의 죽음을 알리는 마지막 장면이다. 빨치산에 대한 국군의 대대적인 토벌이 시작되면서 순철의 생사가 묘연해지자, 동만의 할머니는 무당을 찾아간다. 순철이 돌아온다고 무당이 점지한 날, 순철이 아니라 구렁이가 집으로 들어온다. 기이하게도 두 할머니는 이 구렁이를 보자마자 그것에 순철의 넋이 깃들어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충격을 받은 친할머니가 기절을 하자, 외할머니가 순철의 넋을 달래러 나선다. ‘집안 모두 무고하니 아무 걱정 없이 떠나라’는 말을 들은 구렁이는 결국 홀연히 집을 떠나간다. 인민군에게 아들을 잃은 어머니가 빨치산의 넋을 달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구렁이에 앞에 설 때, 우리는 죽음을 숭고하게 다루는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와 마주하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징그럽고 소름끼치는 구렁이에게서 순철의 넋을 본 것 같은 착시현상이 나타난다.

유현목 감독은 한국전쟁에서 아버지와 형제들을 잃었다. 그로서는 한국전쟁 영화를 찍을 때 ‘반공’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신이 돌아온 친할머니는 외할머니를 불러 용서와 화해를 청한다. 역사의 비극 앞에서 두 할머니는 원수지간이 될 수밖에 없었으나, 마지막 장면에서 그들은 손을 맞잡고 서로의 아픔을 달래며 위로를 나눈다. 지식인 길준과 무식한 순철의 대비 등에서 반공영화의 도식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분단 이전의 전통인 무속의 힘을 빌려 남북 화해의 접점을 마련하고 있다. 이러한 결론은 한국전쟁을 온 몸으로 체험한 세대가 자기 세대의 비극을 더 이상 대물림하지 않겠다는 결의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것은 한국전쟁 세대가 후손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지루하게 내리던 장맛비가 그치고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동만과 마을 아이들이 전쟁 따위는 애초에 없었던 듯 신나게 달려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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