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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영화제 프로그래머, 그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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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화제의 드라마는 단연 <응답하라 1988>일 것이다. 추억을 자극하는 이야기와 음악도 좋지만 <응답하라 1988>의 인기 비결엔 그동안 드라마에서 익히 보지 못했던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차지한다. 류준열, 류혜영, 안재홍, 김선영, 이민지 등 독립영화를 열심히 챙겨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배우들이 이 드라마에서 각자의 매력을 폭발시키고 있다. 독립영화를 열심히 챙겨보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나는 이런 배우들이 비로소 대중적 인정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갑다. 류준열은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소셜포비아>에 이어 올해 <글로리데이>라는 영화를 들고 다시 부산을 찾았다. 류혜영은 <잉투기> <나의 독재자> <그놈이다>로 낯이 익은데 몇 년 전부터 독립영화에서 인정받던 배우다. 안재홍은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족구왕>의 주연배우로 찾아와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민지는 칸영화제 단편경쟁부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문병곤 감독의 단편 <세이프>로 먼저 만날 수 있었다. 이밖에 선우의 어머니로 출연 중인 김선영은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넷팩상을 받은 <소통과 거짓말>에 나왔던 배우다. <소통과 거짓말>의 초반 10분 동안 이어지는 롱테이크 장면에서 김선영이 보여주는 연기는 압도적이다.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 심사위원 문소리 씨는 “주연이 아니라 김선영에게 상을 주지 못했지만 대단한 연기를 보여줬다는 점을 꼭 언급하고 싶다”고 말했다.

<응답하라 1988>의 사례는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보람을 갖게 한다. 다들 재능 있는 배우들이라 언제가 어떤 식으로든 두각을 나타냈겠지만 영화제가 그들의 재능을 보여주는 좋은 장소가 됐을 거라 믿는다. 관객의 숫자는 많지 않지만 영화제 상영 덕에 조금씩 연기력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기고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리라 생각한다.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담당 프로그래머가 되고 올해의 배우상을 새로 만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지난해 올해의 배우상을 받은 <거인>의 최우식이 올해 연말 다른 영화상 시상식에서도 신인배우상을 많이 수상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내 자식의 성공을 보는 듯 뿌듯하다.

물론 프로그래머의 가장 중요한 선정기준이 배우의 연기는 아니다. 배우의 재능을 알아보고 배우의 매력을 제대로 포착하는 감독의 재능, 그리고 무엇보다 연출력이 우선일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선보일 한국영화를 선정하는 경우는 해마다 6월 말 단편, 7월 말 장편 마감을 한다. 8월 중순까지 모든 선정을 완료하는 일정에 맞추자면 독립영화, 단편영화 신작을 모두 봐야 하는 6월부터 8월까지 3개월간이 피 말리는 시간이다. 3개월간이 아닌 다른 기간에도 꾸준히 영화를 보고 선정 작업을 하지만 이 3개월은 주로 어디서도 선보인 적 없는 독립영화에 할애되는 시간이다. 한눈에 좋은 배우를 알아보는 것만큼 한눈에 좋은 감독을 알아보는 것도 쉽지 않다. 작품 선정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는 영화제가 시작되고 관객과 영화가 만나는 순간부터 비로소 알 수 있다. 영화감독이 시사회를 통해 처음 영화를 선보일 때 긴장하는 것만큼은 아니라도 프로그래머가 영화제를 긴장하며 기다리는 이유이다.

자기 작품이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거듭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감독, 배우들을 보면 기쁘다. 한 발 더 나아가 부산국제영화제를 발판으로 유수 해외영화제에 나가 상을 받거나 개봉을 해서 대중적 사랑을 받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벅차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다. 가끔 영화제에 선정되지 못한 이유를 묻는 감독을 만난다. 영화의 장단점을 설명하지만 납득을 못하는 표정일 때도 있다. 그럴 땐 결국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는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 다른 영화제에선 좋은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고. 실제로 그런 일은 많다. 프로그래머는 시험을 내고 점수를 매기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의 영화를 남보다 먼저 보는 관객일 따름이다. 나름의 전문성이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의 안목이 전부는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이 자리를 빌려서 내가 선정하지 않은 영화들에 미안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그중 단편영화 한 편을 꼭 언급하고 싶은데, 영상원 예술사 과정 김석영 감독의 <연애>라는 작품이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출품되었으나 선정하지 못한 이 영화를 최근에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이런 좋은 작품을 왜 선정하지 않은 건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에 볼 때 작위적이라 느꼈던 대목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고 재능 있는 감독을 못 알아봤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영화제 선정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됐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으로선 <연애>라는 단편영화를 추천하는 일일 뿐이다. 다른 영화제에서라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먼저 이 영화를 본 관객의 입장에서 간절히 소망한다. 프로그래머란 내 안목이 틀려 누군가에게 실망을 줬을지 모른다는 불안과 동거하는 직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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