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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사과

강이관, 2008

[한국영화걸작선]사과 대표 이미지

2004년에 촬영이 완료된 <사과>(강이관)는 4년이 지난 2008년에야 겨우 개봉을 했다. 그해 가을, 어느 극장에서 홀로 <사과>를 보며, 내가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확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영화의 몇몇 장면이 내게 남긴 울림만큼은 이 영화를 떠올리는 순간마다 어떤 덩어리가 되어 마음을 친다. 그 때, 나는 <사과>는 어찌되었든 내가 품을 수밖에 없는 영화이며, 강이관 감독의 두 번째 작품도 기꺼이 기다리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사과>는 극장에서 얼마지 않아 자취를 감췄고, 아주 가끔 아트시네마나 영상자료원 같은 곳에서 감독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4년이 흘렀다. 그는 그 사이 단편 몇 개를 완성했고, 마침내 두 번째 영화 <범죄소년>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 보지는 못했고, <사과>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일 거라고 짐작하나, 이상하게도 <사과>를 만들었던 사람의 감흥은 쉽게 훼손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확신 비슷한 마음이 지금 내게는 있다. 

사실, <사과>의 이야기 자체에 특별할 것은 없다. 7년을 만난 남자에게서 갑작스러운 이별통보를 받은 여자가 자신을 얼마간 짝사랑하던 또 다른 남자와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지만, 결혼생활은 불행하고 때마침 과거 그녀를 떠났던 옛 애인이 다시 나타난다. TV 드라마에서도, 우리의 실생활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보았고, 경험했던 이 이야기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영화의 초반, 문소리가 연기한 현정은 사랑하는 이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하는 여자다. 그래서 그녀는 때때로 여우같고, 속물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고 자신의 행복을 찾고 부여잡는데 거리낌이 없어 보인다. 그 욕심은 어린애 같아도 맑고 밝은 욕심이다. 하지만 7년간 사랑했던 남자가 “내가 없어지는 것 같다”라며 어이없이 떠나버린 후, 그녀의 주위를 한 남자가 맴돌기 시작할 때, 그녀에게 더 이상 이전의 얼굴은 없다. 대신 망설임과 머뭇거림이 나타나고, 충만하지 못함을 참으려고 하지만, 이내 얼굴에 그늘이 드리운다. 그러나 과거의 연애를 통해 뜨거운 마음의 이면에는 한없는 초라함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후, 그녀는 무뚝뚝하고 유머도 없지만, 자신을 ‘사랑해주는’ 남자를 선택한다. 그래도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애를 쓴다. 지방으로 전근을 간 남편과 함께 있기 위해 직장마저 그만두고, 예전에 비해 조금은 고단해진 얼굴과 조금은 굼뜬 몸짓을 하고도 여전히 그와 행복해지는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노력하는 자는 그 노력이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오는 순간도 그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한다. 얼마 뒤, 홀로 서울로 돌아온 그녀는 이제 우아한 과장이 되어 있고, 옛 애인을 만나고 있다. 상대의 반응에 온 촉수를 열어두고 변화무쌍하던 여자의 표정과 행동의 활기는 어느새 어딘지 능숙해지고 둔탁해지고 성숙해져 있다. 지금 그녀는 그냥, 그저 산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얼굴을 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클로즈업이나 핸드헬드는 일상의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상투적인 의미보다는,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되찾을 수 없는 삶의 결을 인물의 얼굴, 행동, 그리고 상황의 공기로 섬세하게 포착하기 위해 쓰인다. 

그 결의 변화를 천천히 따라갈 때, 그러니까, 싱싱하던 화초가 생기를 잃고 건조해지는 과정을 지켜보는 시간동안, 그녀처럼 실패하고 또 실패해도 행복해지기 위해 발버둥 쳐 본 우리들이라면, 마음이 서늘해지고 서러워지고 쓸쓸해지지 않기란 어렵다. 그런데 정말 잊을 수 없는 장면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다. 옛 애인과 만나 이별을 선언하며 그녀는 “실은 정말로 노력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라고 말한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를 우리는 끝내 알 수는 없지만, 누구보다도 매순간 절박하게 애써온 그녀가 그렇게 말할 때, 그건 자기반성이나 책임감의 표현처럼 느껴지지 않고, 결국 벼랑 끝에서도 충만함을 포기할 수 없는 자의 마지막 안간힘으로 느껴진다. 그날 새벽, 이혼서류를 들고 방에 들어온 남편이 무력하게 구석에 앉아 있자, 방 한 켠 침대에 누워서 자던 그녀가 손짓을 하며 옆자리를 내어준다. 남편을 뒤에서 꼭 끌어안고 새벽의 침묵 속에서 그녀가 속삭인다. “자자.. 미안해.” 이 새벽은 이들의 마지막 밤일까. 혹은 다시 시작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는 첫 밤일까. 그녀는 무엇을 미안해해야 하는가. 잘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사과>는 더럽게 찌든 우리의 일상에게, 당신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실망하고 좌절할지라도, 여전히 누군가에 대한 나의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나에 대한 그 누군가의 기대를 뿌리치지 못하며, 무엇보다 나 자신의 삶에 대한 기대를 냉소하지 못하는, 그리하여 기어이 행복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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