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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비밀은 없다> 제작기_ 2016/06/13

<비밀은 없다 (이경미, 2015)>

[칼럼]<비밀은 없다> 제작기_ 2016/06/13 대표 이미지

2008년 10월 16일은 영화 <미쓰 홍당무>가 개봉한 날이다. 280여 개 스크린으로 시작해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기고 영화는 종영됐다. 당시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처음 공개하던 때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 배우 공효진의 시뻘건 얼굴을 화면 가득 확대한 초대형 포스터가 해변에 설치됐는데 나는 감동받아 울고 공 배우는 제 얼굴에 충격받아 울었다고 한다. 만일 그해 대한민국영화대상에서 그녀가 여우주연상을 못 받았다면 나는 두고두고 미안했을 것이다. 부산은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매일 매일이 축제였고 그곳에서 처음 환영받았다는 사실에 나의 입봉은 정말 행복했다. 그리고 8년이 지났다.

2016년 6월 23일, 영화 <비밀은 없다>가 개봉한다. 요즘 세상에 8년이면 한 생명이 태어나 두 발로 걷고 한국어와 영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박찬욱 감독님의 차기작인 <도끼> 시나리오 작업을 마쳤고 <여교사>라는 제목의 스릴러를 하나 썼다. 그리고 달력을 보니 2011년이었다.

하루빨리 다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빨리 만들어야 하다는 생각을 자꾸 하면 더 글이 안 써지니까 빨리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안 하려고 노력하며 하루하루를 나도 눈치채지 못 하게 빨리 쓰려고 진짜 노력 많이 했지만... <여교사> 프로젝트는 좋은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고이 접었다. 

그때부터 불면증이 시작됐다. 어떤 수면제도 소용없었다. 3일, 72시간을 뜬눈으로 지새우기 일쑤였는데 매일 침대에서 뒤척이다 동틀 때의 열패감이 어느 정도인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정신이 깨어있는 동안 머릿속은 전쟁터다. 아이디어를 생각해내야 하고 나는 결국 이것을 못 해낼 것이라는 공포와 내가 이것을 해내지 못할 경우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불행할 경우의 모든 수를 시뮬레이션하면서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생각해내야 한다. 아무래도 이 프로젝트는 현생에서 어려울 것 같다, 는 결론 내릴 즈음 거울을 봤을 때 나는 누적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으로 돌이킬 수 없이 늙었고 세상은 2012년 눈부신 봄이었다. 그 와중에 집주인은 전세금의 80퍼센트 인상을 요구했고 시간을 한 달밖에 주지 않았다. 시나리오 마감은 다가오는데 발을 동동 구르며 집을 구하러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다시 화가 난다. 그 집주인 할망구는 인간말종이다. 용서할 수 없다. 지금이라도 살생부에 적겠다. 그리하여 정말이지 너무 급하게 구한 집은... ...안 되겠다. 절대 용서 못 한다. 집주인 이름은 살생부에 피로 쓰겠다. 아무튼 내게 2012년 눈부신 봄의 이미지는 집을 잃고 미래도 잃은 사람 형체의 뼈다귀가 길바닥에 쭈그려 앉은 내 모습이다. 그즈음, 미국에서 영화 <스토커>를 작업 중이시던 박찬욱 감독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 <여교사> 시나리오 있잖아. 거기 서브플롯을 메인으로 발전시켜보는 건 어때?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것도 사치였다. 무조건 쓰기 시작했다. 규칙적으로 움직여야 가장 생산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일어나면 요가. 쓴다. 점심 먹는다. 쓴다. 저녁 먹는다. 운동한다. 쓴다. 잔다.’ 이후 몇 차례 버전이 나왔으나 모두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제는 진짜 더 이상은 죽.어.도. 못 해먹겠다, 싶은 어느 날, 박 감독님께서 툭 던지시는 거다. 네가 지금 쓰는 걸 가지고 내가 미국 배경으로 리메이크 하고 싶은데... 맙소사, 세상아 망해라. 아직도 제가 풀어내지 못 하는 이걸 가지고 리메이크를 하시겠다고요? 그럼 저는 언제 이걸 다 쓰게 되는 건데요?!(오열) 저보다 먼저 리메이크 버전이 나오는 일이 생기면 저는 뭐가 돼요?? 라고 속으로 울부짖으면서 내 입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우선 이번 시나리오가 풀릴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하여 나는 박 감독님과 함께 <불량소녀>라는 제목의 시놉시스(이후 제목은 <비밀은 없다>로 바뀜)를 완성했다. 박 감독님과 쿵짝을 맞춰가니 비로소 쉽게 풀려나갔다. 취향에 따른 제안들과 지레 무겁게 짊어지는 강박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자판을 두드릴 수 있게 만들어준 것이다. 

완성한 시나리오로 투자를 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끊임없는 설득과 협의의 과정은 필수였다. 1년 반에 걸친 후반 작업을 마무리하고 오늘 기술 시사를 마쳤다. 달력을 보니 2016년 6월 13일. 내일은 언론배급시사를 한다. 햇수로 8년 만이다.

길고 지난한 작업 과정에서 스스로 한계를 느낄 때마다 ‘본분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질문을 기준으로 삼고 일어섰다. 그리고 여태 그래 왔듯이 앞으로도 그렇게 일어서겠다. 

이러기도 힘들었을 텐데 긴 시간을 끝까지 나를 믿고 함께 해준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과 사랑을 전한다. 6월 23일 개봉이다. <비밀은 없다>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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