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김해곤, 2006
사랑은 순수하지 않다. 아니 감정은 진실할지라도, 우리가 사회에 속해 있는 한 순결하지 않다. 계급과 지역,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사랑은 끊임없이 침해당하고 변질될 테니까. 서울 변두리 어딘가에서 갈빗집을 하는 영운(김승우)은 동네 룸살롱의 에이스 연아(장진영)와 사랑에 빠진다. 우리가 늘 보던, 화류계 여성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다. 그 남자는 사랑을 하고, 하지만 도망치고, 하지만 잊지 못하는 신파극. <연애,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하 <연애 참>)은 참 식상한 이야기를 들고 나왔던 영화다.
하지만 <연애 참>은 과거의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중심은 사랑 이전에 ‘변두리’다. 사전을 찾아보면 변두리는 ‘어떤 지역의 가장자리’라는 말이다. 영운과 연아가 사는 곳은 변두리다. 서울 중심이나 번화가가 아니라 그냥 어딘가의 동네. 영운은 갈빗집을 하고, 한 친구는 비디오 가게를 하고, 한 친구는 공장 사장님의 아들이다. 나머지 친구들은 건달 아니 한량이다. 별다른 일 없이 적당히 놀고먹는 친구들. 그러니까 영운과 친구들은 변두리에서는 잘나가는 한량 정도다. 날마다 놀고, 먹고, 마시고, 미래 같은 것 생각도 않고 지내는 지질하지만 유쾌한 인생들.
한국 드라마에서는 늘 재벌이 나오고, 영화에서는 조폭들이 나온다. <연애 참>에는 어느 것도 없다. 이권이 크지 않은 변두리에는 조폭들이 크게 설치지도 않는다. 영운의 친구가 룸살롱 호스티스의 기둥서방 역할을 하면 업소 관리하는 건달들이 조금 손봐주는 정도다. 동네 토박이들이 설치고 다니는 것 정도는 눈감아준다. 여기는 그들의 동네니까. 그렇게 영운과 친구들은 변두리의 왕 행세를 한다. 경찰에게도, 건달에게도 꿀리지 않는다. 다만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생겨 충돌했을 때에는 바로 고개를 숙이지만. <연애 참>은 구질구질한 변두리의 정서를 제대로 포착한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우리 동네가 딱 저렇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80, 90년대의 정서에 크게 기울어져 있지만.
영운은 그런 변두리의 한량이다. 사귀는 여자가 있었지만, 연아가 수작을 걸자 바로 넘어간다. 하지만 약혼녀와 헤어지지 않는다. 연아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어머니의 눈이 있고, 뭔가 꺼림칙하다. 그래서 아무 대책 없이 미루고 또 미룬다. 예쁘고, 몸매 좋고, 화끈한 연아가 더 좋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용기가 없다. 아니 용기가 없는 게 아니다. 온갖 추잡하거나 창피한 짓을 할 자신은 있지만, 자신의 사회적 관계에서 이탈할 생각은 없는 거다. 그들이 변두리의 왕으로 남기 위해서는, 최소한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술집 애인은 둬도, 술집 부인을 두는 건 아니다. 그렇게 그들은 치사하고, 쪼잔하다.
신혼여행을 간 첫날밤에 연아에게 전화를 하는 정도의 순정을 가진 영운이지만,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서는 단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려 한다. 술주정으로 영운의 아내에게 전화를 건 연아를 그녀의 집에 가서 무지막지하게 폭행 한다. 연아와 영운의 친구들이 와서 영운에게 한마디씩 하자 나가서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아내에게 울먹이며 해명을 하다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영운을 친구가 본다. 그리고 친구가 하는 말 “씨발 새끼, 진짜 사람 아니네. 그래도 이 대목에서 수경아 사랑해, 는 빼야지.”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고!”, 라며 토해내는 영운을 보고 있으면, 진짜 사람 아니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게 결국 우리네 인생이란 생각이 든다. 변두리에서, 미래 같은 건 보지 않고, 단지 지금의 일상과 오락에 빠져 살아가야만 하는 보통 인생. 그나마 변두리의 왕이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그들은 그 왕 노릇조차 잃으면 진짜 ‘사람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연애 참>은 세련되지 않다. 아니 잘 만든 영화가 아니다. 인물과 대사는 생생하지만, 장면들을 보면 오래전 한국영화를 보는 것 같다. 투박하고, 촌스럽다. 그런데 그 인물들에 빠져들다 보면 야릇하게도 매혹된다. 그 촌스럽고 너절한 인간 군상에. 영운과 연아의 드라이브는, 소형 오토바이를 타고 산동네 도로를 달리는 정도였다. 멋진 산악도로가 아니라 언덕 위의 빼곡한 집과 건물들이 보이는 도로에서의 드라이브. 그런 그들이 무개차로 제주도의 해안 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한다. 멋진 풍경이지만, 그 장면은 여지없이 90년대 한국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의도도 있었겠지만, <연애 참>의 구태의연하지만 생생한 인물들은 바랜 듯한 풍경 속에서 가장 색이 잘 드러난다. <연애 참>의 매력은 구질구질하면서도 악착같이 폼을 내려는 절박한 몸짓 같은 것이다. 영운과 연아의 ‘가벼운’ 연애는 그 극단을 보여주는 것이고. <연애 참>은 미완성처럼 어색하게 마무리하지만, 그 연애의 무거움은 여전히 가슴을 누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