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이국정원
전창근,도광계,와카츠키 미츠오, 1957
한국-홍콩의 첫 번째 합작영화로 기록될 <이국정원>은 한국영화사 안에서 또한 동아시아 지역에 존재했던 트랜스내셔널 시네마의 계보 안에서 매우 중요하게 이야기되어야 할 작품이다. 이 영화는 한국연예주식회사의 임화수와 쇼브라더스의 런런쇼라는 각각의 지역을 대표하는 거물들이 손을 잡고 만들었다. 여기에서 첫 번째 질문, 왜 한국영화는 홍콩과의 합작을 시도했는가? 또 이후 홍콩영화사(이자 동남아시아 영화사)의 한 장을 쓰게 될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 쇼브라더스는 왜 한국과 합작을 해야만 했는가? 그런데 대체 어디에서 이들은 만났는가?
1950년대 중반 이후 한국영화계에는 조심스럽게 해외시장 진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논의는 산업적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아직 박정희의 수출드라이브 정책이 시작될 60년대는 오지 않았다) ‘대한민국’이라는 이 신흥독립국가(이자 정확히는 후기식민분단국가)가 ‘자유진영’ 내에서 스스로의 존재를 부각시킬 필요성 때문이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한국영화가 자국 내 시장이 아닌 외부에 대한 담론을 끌어들이기 시작한 기점은 1956년 아시아영화제에 참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954년, 일본의 다이에이 사장이자 일본영화산업진흥회의 대표(이자 <라쇼몽>의 제작자)인 나가타 마사이치와 런런쇼라는 두 파워맨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영화제의 목적은 분명했다. 아시아 신흥독립국가들의 민족 표상의 전시장이자 반공블럭 내 영화산업의 교류. 잘 알려졌다시피 이승만의 친위 정치깡패이자 1950년대 한국영화계 최고 실력자로 군림했던 임화수는 이 영화제에 참석했고, 거기에서 런런쇼를 만났다.
1920년대 상하이에서 패밀리 비즈니스로 시작된 쇼브라더스는 1950년대에 이미 동남아시아에 막강한 엔터테인먼트 관련 산업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국정원>이 제작되기 시작한 1957년은 바로 이 쇼브라더스가 중화 네트워크를 타깃으로 대규모의 시장 재편을 시작한 해이다. 달리 말해 이는 홍콩영화의 ‘현대화’가 시작된 첫해기도 했다는 말이다. 런런쇼는 쇼브라더스의 영화 산물을 기술적으로 진보시키기를 원했으며, 일본을 중요한 참조틀로 삼아 테크놀로지와 시스템의 현대화를 시작했다. 동시에 런런쇼는 각각 다른 이유에서 다양한 합작 채널을 가동시켰다. 한국과의 합작은 쇼브라더스가 기술 도입(일본), 현지화(필리핀), 시장의 확대(타이완) 등 다양한 성과들을 모색하기 시작하는 와중에 이루어졌으며, 한국 측의 임화수 또한 해방 이후 최초인 이 외국과의 합작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국정원>의 시나리오는 한국 쪽에서 잡은 기초를 바탕으로, 양쪽 각본가들의 공동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한국인 작곡가가 홍콩의 가수와 사랑에 빠지지만 이들이 실은 헤어진 남매였을지도 모른다는 설정은 한국 측의 것이었으며(이후 한국영화와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반복될 모티브!), 이것이 실은 오인이었다는 결말은 홍콩 측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각본에 참여한 유두연은 이 결말이 쇼브라더스의 배급망이 미치고 있는 화교 커뮤니티의 ‘저열한’ 관객수준 때문이었다고 한탄하고 있다) 연출은 한국측의 전창근(全昌根)과 홍콩측의 도광계(屠光?)가 공동으로 맡았으며, 여기에 일본의 와카스기 미츠오(若杉光夫)가 합류하였다.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은 각각 한국의 김진규와 홍콩의 유민(尤敏)이 맡았다. 이 여배우는 1960년 쇼브라더스의 라이벌인 케세이와 도호의 합작영화 <홍콩의 밤>의 홍콩-일본에서의 성공과 이에 힘입어 만들어진 연작들로 곧 아시아의 스타로 부상할 것이다.
이 첫 번째 한홍합작영화는 이 인적 면면만으로도 확실히 흥미롭다. 식민지 시기 상해파 영화인 중 한 명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도자였던 김구와 개인적인 관계를 갖고 있던 전창근은 광복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의 각본과 주연을 맡으며 이후 남한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될 ‘독립운동가’의 표상을 성립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었다. 한편 2차대전 당시 상해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도광계는 대표적인 우파 내셔널리스트 북경어 영화 제작자였다. 그는 1953년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아주영업유한공사(亞洲影業有限公司)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좌파 영화를 우파 민족주의적 내러티브로 리메이크하는 데에 탁월한 기량을 보인 바 있었다.. 와카스기 미츠오의 참여는 기술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도 전창근과 도광계는 컬러 필름 사용에 익숙하지 않았다. 쇼브라더스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서 와카스기 미츠오와 함께 당시 신동보(新東?) 소속이었던 촬영감독 니시모토 타다시를 초빙했다. 이들은 각각 하극의(華克毅)와 예몽동(倪夢東) 이라는 중국어 예명으로 크레딧에 기재되었다(한국에서는 아예 이들의 존재를 지웠다). 일본인 인력에 대한 이러한 처리 방식은 1960년대 중반 이후 쇼브라더스가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연출자를 포함한 일본인 스탭들의 고용방식의 전범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쇼브라더스는 일본으로부터 기술적 노하우를 전수받기를 원하면서도, 이들이 지닌 일본이라는 내셔널리티는 삭제해두고자 했다.
<이국정원>은 쇼브라더스로서도, 임화수로서도 일종의 기술적 실험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칼라필름’의 시도야말로 이 합작 영화의 진짜 목적이었다. 이는 임화수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합작영화를 제작하는 의의는 우방국과의 문화교류라든가 우리 문화 소개라든가 합작을 함으로써 해외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든가 하는 것도 있겠으나 이것을 기회 삼아 우리 영화의 기술면을 향상시켜야 하겠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 아닐 수 없다.” 임화수, 조선일보 1958.2.20
컬러필름은 당시의 ‘세계표준시’였다. 한마디로 말해 한국과 홍콩영화는 영화적 보편’으로 상정되어 있던 할리우드 영화에 근접한 어떤 것이 되어가야 했는데, 바로 이때 그 보편은 칼라필름이었던 것이다. <이국정원>이 이스트만 컬러로 촬영되었다는 사실은 이 점에서 다시 한번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57년과 58년 한국영화는 계속해서 컬러를 시도 중이었으나 거의 대부분 실패했다. 그에 비해 이 영화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선려(鮮麗)한 화면’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영화는 ‘컬러’에 관해 말하자면 일단 성공한 것이다. <이국정원>의 필름 현상은 일본에서 이루어졌다. <이국정원>이라는 영화를 둘러싼 이 기술 과정은 한국영화에 있어서 일본영화라는 강력한 그러나 ‘숨은’ 참조점이 어떻게 작용하고 있었는가에 관한 강력한 예시를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이국정원>이 흥미로운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 남성과 홍콩 여성이라는 그‘전형적’인 설정 때문이다. 이 설정은 이후 한국영화가 거듭 반복하게 될 것인데, 한국남성들은 이국(으로부터 온)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여자들이 온 장소는 대부분 홍콩이거나 도쿄이다. 다시 말해 이 분단국가는 이 영화에서부터 이후 다른 동아시아 ‘자유진영’ 국가들에 대한 스스로의 젠더를 결정지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이 영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런런쇼와 임화수의 파트너십은 끝났다. 5.16과 함께 임화수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며, 한국영화계는 대대적인 지각변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영화 이후 4년 만에 런런쇼는 드디어 신상옥이라는 최적의 파트너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만남의 장소는 마찬가지로 아시아영화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