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
박노식, 1976
박노식은 배우 ‘용팔이’가 아닌 ‘감독 박노식’으로서도 여러모로 연구해볼 만한 사람이다. 단언컨대, 감독 박노식은 한국영화사에 있어 진짜 ‘컬트’ 영화를 만든 몇 안 되는 사람이다. 먼저 박노식 스스로 ‘주먹 배우’라 지칭할 정도로 악명을 떨쳤던 그는, 경찰 폭행으로 인한 구치소 생활 중에 감독이 되어 자신의 영화인생을 확 바꿔보리라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가 세상을 뜬 1995년 출간된 자서전 「박노식 은막 43년의 고백: 뻥까오리 백작」을 보면, 그 순간에 대해 “마치 인생 사표를 쓰고 인간답지 않은 벌레만도 못한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 번 든다. 갑자기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지금 내가 느낀 이 아픔을 팬들에게 보여주고 심판을 받아보자. 나는 연기, 감독, 제작에 시나리오까지 1인 4역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고 쓰고 있다.
사실상 박노식이 즉흥적으로 영화감독을 꿈꾼 것이라면 거기에는 어떤 ‘결핍’이 있었을 것이다. 가령 그는 김진규, 신영균, 신성일, 남궁원 등과 비교해 손색없는 주연급 배우였지만 수상경력이나 비평적 인지도에 있어서 다소 저평가된 측면이 있다. 직접적인 근거가 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일례로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지난 2004년 펴낸 「한국영화사 공부 1960-1979」를 보면 박노식이라는 이름은 그들과 달리 아예 색인조차 없다. 아무래도 ‘작가영화’의 주인공이기보다는 ‘성격파 배우’ 혹은 ‘용팔이’로 대표되는 상업적 아이콘으로 더욱 각인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감독 데뷔작은 어딘가 당시 구치소 시절의 기억이 투영된 것 같은 제목을 지닌 <인간 사표를 써라>(1971)였다.
<인간 사표를 써라>부터 ‘복수극’과 ‘멜로드라마’라는, 이후 박노식 감독의 작품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두 개의 테마가 보인다. 직접 주연까지 도맡은 그의 야심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위험한 스턴트와 더불어 당시로선 무척 드물었던 자동차 추격 장면은 물론, 자신의 두 눈을 뽑아 주려고 하는 극단적 신체 훼손의 묘사가 난무했다. 물론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형적인 할리우드식 영웅 서사의 답습이었다. 그런데 이후 <나>(1971), <쟉크를 채워라>(1972), <지프>(1972)를 차례로 연출한 뒤 또다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된다. 사회 각층의 대표적인 폭력배를 검거하라는 지시에 의해 억울하게도 2년 전 폭력사건이 빌미가 돼 시범 케이스로 걸린 것이다. “하도 집행유예를 많이 당해서 <집행유예>라는 제목으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그는 실제로 <집행유예>(1973)를 만들었고, 연출자적 광기는 더욱 극단적으로 나아가게 된다. 형무소에 수감된 그가 복수를 위해 탈옥하려고, 스스로 나병 환자가 된 것처럼 꾸미려 하는 장면이 단연 압권이다. 그런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이 캐릭터에 녹아든 게 아닐까 싶다.
이후 박노식 감독의 극단적인 영화관과 세계관을 가장 절묘하게 드러낸 <왜?>(1974)와 <광녀>(1975)를 지나, 그의 인장이 뚜렷이 새겨진 마지막 작품이 바로 <악인이여 지옥행 열차를 타라>(1977)다(물론 감독으로서의 유작은 1983년에 만든 <돌아온 용팔이>다). 두 눈을 잃고 장님이 된 박동혁(박노식)과 한예지(안보영)의 가슴 아픈 멜로드라마로, 광복 이후 일본군 패잔병들에 의해 눈이 멀게 된 동혁이 세월이 흘러 복수를 꿈꾼다. 아예 두 눈을 잃어버려 복수하기가 도무지 힘들어 보이는 상황을 연인이 도와준다는 설정은, 그 특유의 ‘복수의 멜로극’이라는 테마를 극한까지 밀어붙여 장르적으로 접붙인 것이다. 동혁을 위해 눈이 돼 주는 예지의 모습과, 눈이 먼 채로 동혁이 갖가지 살인 기술을 익혀 사용하는 모습이 현재의 시선으로는 다소 우스꽝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는 그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더불어 카체이스신 등 그가 선호했던 상업적 요소 또한 소홀하지 않는다. ‘일본군’과 ‘금괴’라는 이른바 ‘대륙물’로 대표되는 당대 한국액션영화의 단골 소재들도 뒤엉켜, 극과 극이 맞부딪혀 끝까지 나아가는 당대 한국 장르영화의 기이하고 뒤틀린 욕망을 보여주는 것.
보통 배우 출신 감독은 함께 오래도록 작업한 감독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황야의 무법자>(1964)를 통한 셀지오 레오네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관계다. 그런데 박노식은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 중 스타일 면에서 유사한 이를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극단적 연출자적 광기는 과연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앞서 얘기한 자서전의 첫 문장은 “난 원래부터 평범한 삶은 싫었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그것은 배우 박노식과 감독 박노식의 세계관 모두에 적용되는 말이다. 어떻게든 남과 달라야 한다는 필요 이상의 강박관념이 늦깎이 감독의 조바심에 깊숙이 투영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남들이 괴상하다고 여길지언정 뭔가 색다르다고 받아들인다면 성공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불균질함을 넘어 거의 무질서하기까지 한 그 영화들의 내적 리듬과 디테일이 심지어 묘한 매혹으로 다가온다. 당시 그의 영화들은 한국영화사를 통틀어도 주변 감독들과의 유사성을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컬트’였다. 그처럼 ‘감독 박노식’은 ‘용팔이 박노식’과 달리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후 박노식은 마치 아무 것도 보기 싫다는 듯, 마치 눈이 먼 영화 속 주인공처럼 미련 없이 한국영화계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 스스로는 눈치 채지 못했더라도 남과 다르고 싶다는 욕망이 기어이 기존의 장르영화들을 작파하게 만든, 진짜 B무비를 만든 당대 거의 유일한 한국 감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