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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예라이샹

정창화, 1966

[한국영화걸작선]예라이샹 대표 이미지

<예라이샹>이라는 영화는 기묘한 구석이 있다. 영화가 시작하면 조세영(신성일)이 긴급하게 도피하고 있다. 4.19. 혁명의 시간이다. 세영은 난희(문정숙)의 집으로 들어간다. 난희는 세영을 모르지만 당시의 정치적 저항에 공감하는 그녀는 오른손을 다친 세영을 의사를 불러 와 치료해준다.

이러한 도입부는 정치적 긴급 상황이 로맨스의 조건이 되는 다른 해방 이후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불러온다. 예컨대 대표적인 포스트 해방 영화 <자유만세>(1946)도 이렇게 시작하고 끝난다. 

“일제하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지하공작을 하던 전창근이 어느 날 일경에게 쫓기다가 총을 맞고 급한 김에 아무 집에나 뛰어 들어가 숨게 되었다. 간호원인 그 집 딸 황려희가 그를 숨겨주어 위기에서 구출된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을 느꼈지만 전창근은 조국광복에 바친 몸이기에 미처 사랑도 외면해야만 했다. 그런 어느 날 그들이 일경에게 발각된다. 악착같은 일경의 추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항전하다가 조국광복의 날을 눈앞에 두고 장렬하게 죽어간다.” 

배경은 이렇듯 1960년의 4.19이고, 세영과 난희의 만남도 혁명의 시간 속에서 배태되었으나 <예라이샹>이 사회와 개인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물론 매우 다르다. 우선 세영과 난희는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 빠진다기보다 난희는 세영을 극진하게 간호하고, 세영은 난희에 감사와 애정을 가지게 된다. 위의 <자유만세>와는 달리 세영은 난희를 조국을 위해 외면하지는 않는다. 이들의 계층적 위치가 일차로 문제로 등장한다. 난희는 바 (bar)걸이고 세영은 명문 법대 4학년이라 고시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이 계층의 문제가 내러티브의 쟁투 지점은 아니다. 

솜씨 좋은 감독이자 흥행사인 정창화가 조각해내는 긴급 상황 속의 남녀, 세영과 난희에겐 풀어야 할 다른 숙제가 있다. 그것은 이 혁명의 시간과 어긋나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상해에서 일어났던 모종의 사건이다. 이 상해의 시간과 현재 (1960)의 시간의 중첩이 일어나는 시점은 영화가 공개되는 1966년쯤이다. 그 사이 1961.5.16이 있었으나 영화는 그 사건을 부재시킨다. 동시대적 이벤트를 서사의 의식 안에 매립하고, <예라이샹>은 과거 상해 조직 세계의 어떤 치명적 문제를, 현재에 간섭하는 역사의 트라우마로 삼고 예의 바걸과 재즈 밴드를 클럽에 소재시켜 ‘Moritat’을 연주하게 한다. 여기서 영화는 역사와 한 시기(period)를 전면화하는 형식과 이별하고, 가정과 세계의 변증법인 멜로드라마와도 작별하여 필름 누아르의 뒤틀린 어법과 미장센으로 우리를 이끈다. 밤의 거리, 밤의 여자인 팜므파탈, 성적 도착, 남성적 힘과 권력의 간극, 폭력의 법, 방관하거나 지나치게 참견하는 국가의 법, 음모, 돈의 어지러운 누빔이 만화경처럼 펼쳐지는 필름 누아르 말이다. 그래서 <예라이샹>은 상해의 프랑스 조계 지역에 주로 거주하며 독립 운동가로서 그리고 문예활동가로서 살아가던 사람들보다는, 당시 가난에 못 이겨 매매춘과 아편 판매를 하던 유민들도 어느 정도 의식하지만, 오히려 <상해에서 온 여인>과 같은 1948년 오손 웰즈의 필름 누아르를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웨스턴을 참조한 대륙 활극, 액션 장르, 한홍 합작을 열었던 장르 영화의 대가의 참조체계를 보자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필름 누아르가 불려옴으로써 영화는 상해의 밤과 더불어 미국의 밤을 서울의 밤거리에 이중인화시킨다. 역사적 파편과 당대 긴급성의 선택적 배치 (4.19의 현존과 5.16의 부재), 장르적 관행이 <예라이샹>을 이질적으로 횡단하고 있다. 이것이 기묘한 복합성을 이루는 야래향의 “리좀” 들이다. 야래향의 향기 따위는 이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환원되지 않는 이질성들이 걸출한 장르 영화 감독이 만든 대중 영화의 데칼코마니적 비/재현 안에서 표출된다. 리좀들이 만들어내는 지도 그리기 (cartography)는 해결되지 않은 도착적인 근대의 기억과 트라우마가 행위자의 연속적 수행에 의해 재연되며 재앙과 비극이 재생산된다. 

가까운 5.16을 오히려 부재시키고, 상해를 소환하는 문제는 잠깐 괄호 속에 넣고, 기묘한 시간의 중첩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예라이샹>이라는 제목 자체가 대만 가수 덩리쥔의 노래 <夜?香 yelai xi?ng>(문근영이 <댄서의 순정>에서 번안해 불렀던)를 연상하게 하는 것처럼, 영화는 지리적 상상력의 배후를 서울의 클럽 풍경을 매개해 중국 상해로 끌고 간다. 서울의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명곡 ‘Moritat’는 “미국의 밤”으로의 접속이다.

시간과 공간의 이과 같은 전치적 중첩은 위에서 이야기한 필름 누아르 인용과 더불어, 동시대적 한국 영화의 지형에서 보면 정창화 감독 자신이 성취한 “대륙 활극”과도 접속한다. 대륙을 전면적으로 배경화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 이만희의 대륙 활극이 엮어내는 비대칭적 “역사적 쌍” (강점기의 민족주의와 박정희 체제의 국가주의라는 다른 시대적 요구들을 배치해 비대칭성을 강조하는 <쇠사슬을 끊어라>)을 이 영화에 소급 적용해보면 상해의 1930년대와 남한의 1960년대가 어둠의 세계로 겹쳐지고, 거기에 재즈와 댄스가 있는 클럽 문화로 불야성을 이루는 미국의 밤이 삼중 노출된다. 밤에 도착하는 꽃향기라는 야래향을 빌어 말하자면, 밤들이 도착한다. 상해와 남한의 혁명의 어둠 , 그리고 미국의 밤.

다문화라면 다문화이고, 한국 영화가 불러오는 세계라면 세계인데 거기에 역사성과 정치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역사와 정치가 표준어가 아닌 다른 방식의 “은어”, 필름 누아르를 통해 형상화되기 때문에 다른 읽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은어는 성적 변이와 청산되지 않는 과거의 비밀을 말하기 위한 방식이다. 은어와 더불어 방언이 있다. 필름 누아르의 번역으로서의 방언인 코리안 누아르는 선취된 근대의 밤인 상해를 아메리칸 필름 누아르의 형식으로 말한다.

영화의 도입부는 혼자 칵테일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여자 난희(문정숙)의 미디엄 숏으로 거기에 제작 등 크레딧이 올라간다. 팜므파탈이 소개되는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바걸과 엘리트 남자 대학생의 결합은 사실 큰 반대에 부딪히지 않는다. 난희와 세영, 두 사람 모두에게 부모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시국이 어수선하기도 하여 세영의 지도교수도 별달리 이들의 관계를 비판하지 않는다. 

관계의 문제는 오히려 예의 “상해” 커넥션에서 발생한다. 난희의 단골고객들인 박사장 (최남현)과 허상무(허장강)은 난희에게 도착적인 관계를 강요한 사람들인데, 4.19로 가정교사를 하던 집이 불타버려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세영은 박사장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설상가상 박사장과 허상무는 상해에서 난희의 아버지를 죽이고 재산을 빼앗았다. 박사장은 어머니를 겁탈해 딸까지 낳았는데 가정교사로 들어간 세영을 흠모하는 박사장의 큰딸이 바로 박사장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난희의 이복자매다. 물론 난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 상해에서 아버지의 옛 친구가 “중공”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돌아와 이 비밀을 알려주는데, 그는 박과 허에게 살해당한다. 난희는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박사장을 죽여 복수한다. 그녀는 감옥에 갇히고 세영과 난희의 이복 자매가 그녀를 찾아온다. 

복수가 이루어지긴 하지만 복수를 통한 정의의 구현이라기보다는, 허망한 정서가 만연하지만 젊은 세대의 패배는 아니다. 팜므파탈적 여성의 소란한 출현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4.19를 거친 새로운 젊은 남성 엘리트가 처한 어떤 국면, 함정, 유혹, 필요 등을 포착한다. 그가 법대생이라는 것은 우연한 설정만은 아니다. 법을 이해해야 하는 사람이 목도하고 관계하게 된 상해에서 서울에 이르는, 과거에서 현재에 이르는 폭력적 (불)법의 존속. 난희는 그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하고, 체험하게 하지만, 몸으로 그 사태를 받아치고 끊어내는 것은 그녀 자신이다. 아버지가 부재한 세대, 5.16은 괄호 부호 속에 여전히 은밀하게 숨어 있고 어머니 대신 팜므파탈적 여성이 과거의 매듭을 끊고 간다. 

5.16의 텍스트 속 은닉과 더불어 구조화된 부재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 역사적 언급이나 참조다. 필름 느와르, 재즈의 문화적 형식을 빌어 미국적 모더니티는 텍스트의 형식으로 통합되어 있고, 상해는 두 명의 악당 에이전시를 통해 불려오나 한국 근대사에서 상해가 놓여있는 자리, 맥락은 일제 강점기이나 이 텍스트에는 그런 컨텍스트적 의식이 없다. 증후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언급했듯이 대륙활극, 한홍합작 등을 이루어낸 감독의 지정학적 역사 판타지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나이트 클럽이 끝날 때를 기다려 난희를 찾아온 세영과 밤길을 걸어갈 때 난희가 그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전 이들은 고통을 겪었다. 세영의 표정을 살피며 난희가 “사랑해”라고 말하고 거리는 어둠 속에 있고 그들은 계속 걷는다. 표정과 언어와 발걸음, 카메라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은 삶을 살아가야 하는 여성의 정동을 미묘하고 가슴 저리게 전한다. 한국영화사에서 드문 장면이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어두운 골목길에서 움직이며 전달할 수 있는 여성의 자리, 여배우 문정숙 의 탁월한 연기의 성취는, 순간적이나마 “세계를 안에서부터 밖으로, 밖에서부터 안으로 ” (아리프 딜릭) 읽는 하이데거의 월딩의 새로운 자리이며 열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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