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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흑맥

이만희, 1965

[한국영화걸작선]흑맥 대표 이미지

이만희 감독은 1965년 한 해 동안 <흑룡강>, <7인의 여포로>, <흑맥>, <시장> 등 네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이 가운데 <흑맥(黑麥)>은 이 감독이 <7인의 여포로>로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고 재판 중인 과정에서 읽은 이문희(李文熙)의 장편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그가 처음 손댄 문예물이라는 사실과 당시 갓 여고를 나온 열여덟 살 대학 신입생의 데뷔작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그 신인 배우가 1천여 명의 공모자 가운데서 뽑힌 이순임(李順任). 바로 뒷날 윤정희, 남정임과 함께 트로이카 스타의 한 축을 이루며 한국영화에 기여한 문희(文姬)이다. 이만희 감독은 그녀에게 본명 대신 원작자의 이름(발음)을 딴 ‘문희’라는 예명을 붙여 주었다.

전쟁의 후유증과 사회악에 대한 비판의식이 짙게 깔린 이 영화는 이만희 특유의 과감한 용인술과 캐릭터의 설정, 영상 감각이 돋보인다. 여기에는 서정민(촬영)의 짜임새 있는 화면구도도 한몫을 하였다. 6,25동란 후 서울역 주변에는 깡패, 양아치들의 폭력과 절도, 매음이 만연되고 있었다. 이들 독초의 왕초는 목사인 아버지를 잃고 단신 월남하여 거리를 헤매다가 용산 패를 거느리게 된 독수리(신성일)이다. 이런 그 앞에 어느 날 미순(문희)이 나타난다. 하나뿐인 어머니를 여의고 서울로 일자리를 얻으러 왔다가 날치기 패들에게 걸려든 시골소녀이다. 독수리의 똘마니가 미순의 성경책을 훔치고 달아나는 바람에 생긴 일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미순은 비록 그들의 소굴에서 지내지만 두려움을 거두고 더러운 빨래와 끼니를 도와주며 잘 적응해 나간다. 마음도 열게 된다. 독수리도 미순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청순한 미순의 사랑이 빗나간 왕초의 마음을 녹인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그의 진심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미순을 사랑하면서부터 독수리는 두목으로서 박력을 잃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미순이 집을 나가자 독수리는 그녀가 몰래 나간다는 명동의 스탠드바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미순을 희롱하는 명동파 왕초를 보고 참다못한 독수리가 격투 끝에 그만 그를 살해하고 만다. 미순을 뒤에 남기고 수사관에게 끌려가는 독수리. 그는 수갑 찬 손을 미순이 보지 못하도록 성경책으로 얼굴을 가리라고 부탁한다. 
“인생이란 결코 뜻대로 운행되지 않는다. 본래는 허약했던 목사 아들이 도둑놈 우두머리로 출세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 주고 있어. 기차를 탄다고 반드시 가고 싶은 델 갈 수 있는 건 아냐. 도중에 기차가 뒤집히는 수도 있거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이 장난감 기차뿐이야!” 
피를 토하듯이 내뱉는 독수리의 독백이 화면을 덮는다. 

<흑맥>은 전쟁으로 인해 깜부기병에 걸린 보리처럼 사회에서 버림받은 부초(浮草) 같은 인생의 이야기이다. 이만희 감독은 여주인공 미순을, 때는 묻었지만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청순한 이미지로 승화시키고 있다. 그녀는 독수리에게 신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이다. 

이 영화에는 ‘쪼아온다’, ‘토꼈다’는 등의 은어가 많이 나온다. 이런 대사에서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전후 젊은이들의 비행과 일탈적 삶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 작품의 특징은 등장인물을 거의 신인으로 충당했다는 점이다. 그들 중에는 배우지망생이 아닌 촬영 조수나 조명기사, 연출보 등 뒤에서 돕는 스태프들도 끼어 있다. 연기 면에서 독수리 역의 신성일은 <성난 능금>(김묵, 1963) 이후 모처럼 분출하는 힘을 안으로 삭이려는 노력을 보여 주었고, 문희 역시 눈의 매력을 활용한 연기로 기대를 모으게 하였다. 아무튼 <흑맥>은 <돌아오지 않는 해병>, <만추>, <삼포 가는 길>과 더불어 이만희 영화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필름이 보존되어 있지 않아 기록상으로나마 반드시 남겨야 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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