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칼럼]공부하지 않는 애니메이션의 미래
어릴 적부터 본 애니메이션 작품 수를 세어보면 족히 수 천 편은 될 듯하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나의 애니메이션 탐식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2000년대 들어서고 나서다. 그리고 지금은 특별히 관심이 가는 작품이 아니면 보지 않게 되었다. 세월 탓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러기에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과거 작품들을 찾아보는 횟수는 반대로 더 늘었다. 무엇 때문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함량미달의 작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함량이란 애니메이션 창작에 대한 공부를 말한다. 공부가 부족한 애니메이션. 신선한 테마도 드물고, 신선한 표현양식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새롭다고 우기는 스토리텔링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누군가 말했듯이 ‘카피의 카피의 카피’다. 이것은 세기말을 지나고 세계 모든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주변사람들도 역시 많이 공감하는 부분임에 틀림없다. ‘때깔은 좋은데, 보고 나면 특별히 기억나는 것도 없고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 시간 죽이기 볼거리’가 현재 애니메이션을 바라보는 일반적 시각. 소장해 계속 보고픈 작품이 드무니, DVD나 블루레이의 판매도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냥 인터넷에서 후딱 다운로드 받아서 한번 보고 휴지통으로 휙, 삭제버턴을 누르는 상황이 현재 애니메이션 소비의 냉혹한 현실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몇몇 감독이나 작가들의 사투 속에 인상적인 애니메이션이 종종 발표되기는 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시장 전체에 영향력으로 퍼지기에는 공부하지 않고 비주얼에만 치중한 창작풍토가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상황에 너무 굳어진 상태다. 해마다 여름이나 겨울 방학시즌이면 쏟아져 나오는 미국의 극장용 블록버스터 애니메이션들은 자의든 타의든 그런 흐름을 주도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그들만의 방식으로 공부를 하며 새로운 도전들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공부 또한 블록버스터 공식에 따라서 재단될 뿐, 진정 새로운 시도와는 다른 방향의 궤도를 그린다. 그렇다면 대작 이외의 작품들은 공부를 하고 있으냐 묻는다면, 그 역시도 그리 녹록치 않다. 제작비가 많지 않으니 상황은 절박해 상업성은 더 요구될 터이고, 공부를 한 낯선 작품보다는 시장에서 팔리는 비주얼 일변도의 익숙한 작품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왜 공부하는 애니메이션이 필요한 것일까? 이는 디지털환경 속 경쟁에서 애니메이션이란 미디어가 갖는 존재감이 점점 약해져가는 위기감 때문이다. CG기술의 발달로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영화의 경계가 허물어져버린 이유가 가장 크다. 즉, 실사쪽은 애니메이션 고유의 매력을 끌어들였지만, 애니메이션 쪽은 입체감과 이펙트 외에는 특별한 매력을 끌어들이지 못했다. 결국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영화의 크로스오버로 애니메이션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실정에까지 이르렀다.
어쩌면 CG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애니메이션 제작이 편해지고 효율도 높아졌을 수 있다. 하지만 애니메이션만의 정체성은 그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위협을 받지 않나 생각된다. 설령 흥행성적은 좋다고 해도, 애니메이션에 관한 고유인식은 예전만 못한 것이 현실이다. 애니메이션인지 실사인지 모호한 상태로 관객에게 다가오는 것이 오늘날의 영화이다. 테크놀로지와는 무관하게 애니메이션만의 장점을 살린 공부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애니메이션의 정체성은 미래에 온전히 보존되기 쉽지 않을 듯싶다.
(사진설명)
2012년 발표된 픽사의 <메리다와 마법의 숲>. CG 애니메이션의 대명사임에도 ‘만화영화’ 장르를 확고히 구축한 픽사의 작품치고는 여러 면에서 부족함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