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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올드보이

박찬욱, 2003

[한국영화걸작선]올드보이 대표 이미지
박찬욱은 한국형 작가주의 감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웰 메이드와 작가주의는 그렇게 사이좋은 단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웰 메이드라는 수식어 속에는 상업적으로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작가주의라는 말 속에는 대중과 타협하지 않는 고집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개성이 담겨 있으면서도 장르적 관습을 유지하는 것, 이 행복한 조우가 박찬욱 영화에서 실현되곤 했다. <올드보이>는 이 가능성이 알맞은 농도로 희석된 최적의 작품이었다. 

알려져 있다 시피 <올드보이>는 일본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원작에서 가져 온 것은 15년간의 감금, 사설 감옥이라는 설정 정도에 불과하다. 오히려 <올드보이>가 깊이 관련 돼 있는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고전 비극 <오이디푸스 왕>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이 범인임을 알기 위해 복잡한 퀴즈를 풀고 험난한 미로를 헤쳐 나와야 했던 자, 그 오이디푸스의 비극적 운명이 오대수의 삶에 거울처럼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오이디푸스>와의 공통점은 여러 지점에서 발견된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공통점은 두 작품이 다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를 중요한 모티프로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작품이 각각 최고의 플롯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플롯을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선택한 행동에 따른 결과로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되는 것, 이라고 말이다.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성장한 고장을 떠나 고향으로 되돌아 오듯 오대수 역시 스스로 질문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 여정은 점점 자기 자신에게로 좁혀 든다. 고대 그리스에서 오이디푸스의 몰락은 흠결없는 고귀한 영혼의 파멸을 의미했다. 오이디푸스처럼 지혜롭고 도덕적 인물도 신의 계획 앞에서는 어쩔 도리없는 피조물에 불과하다. 하물며, 우리처럼 평범한 시민이야! 오이디푸스의 파멸은 곧 절대적 신을 생각게 했다. 

반면, 오대수는 무의식 중 저지른 말 실수로 무시무시한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알고 저지른 죄와 모르고 저지른 실수 중 어떤 것이 더 무거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까지 가능해 진다. 그런데 정말 전복적인 부분은 영화의 결말 부분이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박찬욱은 오대수의 입을 빌어 관객에게 묻는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은 살 만한 자격이 없는 건가요?”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에게 시민의 자격을 박탈하고 추방자의 숲으로 내몰았다면 박찬욱은 현대의 오이디푸스, 오대수에게 항소의 권한을 준다. 삶과 인간성, 도덕성에 대한 질문을 과감히 관객에게 넘긴 것이다. 오대수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의 대가로 소문을 퍼뜨렸던 그 “혀”를 거세하고 기억을 지운다. 기억을 지우고 말을 않는다면,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는 “말”의 세계로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볍게 박찬욱은 법이나 질서라는 세계를 넘어간다. 

이 주제적 파격은 박찬욱이 조형한 미술과 음악, 편집의 리듬을 거쳐 막강한 에너지로 증폭된다. 미도의 의상, 벽지, 우산 등의 소품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방사형 패턴은 스릴러적 긴장을 강화했다. 한편 극도로 인공성이 강조된 아파트나 감금실과 같은 공간은 그들이 처한 상황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런 앙상블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미도의 테마와 같은 음악에서도 발견된다. 음악을 통해 오대수와 미도, 우진과 수아 간의 운명적 조우는 비극적 데칼코마니로 증폭되었다. 

<올드 보이>의 강렬함은 이야기와 미쟝센 그리고 그것을 유연하게 연결하는 편집의 황금 비율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박찬욱의 작가적 개성과 스릴러의 장르적 관습 그리고 이종 결합적 장르 교배가 가져 온 에너지가 <올드 보이> 전반에 범람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 독특한 결과물이 해외 영화제 뿐만 아니라 평단과 관객 모두에게 주목과 사랑받았다는 사실이다. 한국 영화에 있어 가장 흥미로웠던 순간을 바로 이 영화 <올드 보이>가 함께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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