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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소박하게 털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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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만들고 있지 않은 시간이 꽤 되었고, 요즘 뭐하고 사냐는 질문을 받는 빈도도 그만큼 늘어가던 차에, 그럴 때마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 조금씩 준비하고 있다’는 뭔가 숨기고 있는 듯 애매한 대답을 하기에도 지겹고 한심스러워서, 친구들 몇 명과 일주일 정도 매일 만나 한 시간 조금 넘는 분량의 영화를 한 편 만들었다. 편집은 벌써 끝났지만, 전부터 이런저런 부침을 겪으며 느릿느릿 진행되던 두 번째 장편영화의 준비에 들어가느라 후반 작업에 손도 대지 못한지 어느덧 반년. 그렇지만 조만간 어떻게든 마무리될 거라고 본다. 주연을 맡았던 남자배우가 하반기에 입대할 예정이라 그 전에 후시녹음 분량을 끝내야 하고, 무엇보다 이번 영화엔 그의 대사가 아주 많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보다 진짜 문제라면, 또 다른 주인공인 미국 아틀란타 조지아 출신의 여자배우가 내게 전화 한 통 없이, ‘아빠가 화를 내며 빨리 집에 돌아오라고 소리쳤다’는 페이스북 메시지 한 줄 달랑 남기고 이역만리 고향 아틀란타 조지아로 떠나버렸다는 사실이겠지만, 이것 역시 며칠 책상에 엎드려서 고민하다 보면 해결방안이 떠오를 것이다. 떠오르겠지? 떠올라야 한다. 꼭. 

그러니까 당시엔 통장에 잔고도 좀 있겠다, 맘 잡고 새 프로젝트에 들어가기 전에 가벼운 단편영화 하나 찍어볼 생각으로 촬영감독 친구에게 카메라 들고 일주일쯤 지방에 놀러 갔다 오자고 꾀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영화학교 입학할 때 심사받으려고 만들었던, 귀엽지만 저질스러운 만듦새의 포트폴리오를 다시 만들어볼 작정이었고, 그즈음 지역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제작지원도 알차게 받아서 결국 6회차에 모든 촬영을 마무리했다. 이제껏 어둡고 기이하면서, 소수의 관객들에게 변태적으로 아부하는 영화만 주로 찍어오다가 이처럼 가볍고 발랄한 필-굿-로맨틱코미디를 만들고 있자니, 아침에 촬영현장에 가는 일도 예전만큼 괴롭거나 죽을 맛이 들지 않아서 좋았고, 게다가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비교적 수월하고 별다른 스트레스 없이 진행되는 과정을 거의 최초로 경험하다 보니, 앞으로 영화 작업을 계속할지 말지 진지하게 재고해봐야겠다는 지난 과거의 결심이 충동적이었을 거라는 의심도 해보게 되었다. 후반 작업을 제대로 끝내놓고 할 소리겠지만, 앞에서 언급한 이유들만으로도 이번 영화는 무척이나 좋은 경험이었고 만족스런 작업이었다고 자평해본다. 영화의 재미가 이와 비례할지는 모르겠지만... 아이 돈 케어. 

사실상 이렇게 좋은 기분의 영화 만들기 놀이를 내게 선사해준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지난 2년간 지역 영상미디어센터에서 나와 영화제작 워크숍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다. 새 영화작업이 생각만큼 잘 풀리지 않아서 의기소침했던 지난 시간 동안, 하루 평균 너 댓 시간씩 산책이나 하고 자전거만 타고 다녔던 나에게, 그들은 거의 유일하게 뭔가 유의미한 재미를 주고 있다고 느끼게 해준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 나로 하여금 이번 영화 작업을 충동적으로나마 하게 만든 자극을 주어서 결국엔 만족스러운 자평의 시간을 가지게 한, 직접적인 동기를 준 한 친구와 그(여자감독이지만 편의상 ‘그’로 호칭한다)의 영화를 소개하려 한다.

워크숍 당시에는 그의 시나리오가 수강생들의 투표로 결정되는 수료작으로 선정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시나리오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얼마 후에 있을 다양성영화제작지원 공모를 통해서 꼭 영화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입에 발린 소리를 진심으로 떠들어댔다. 감독은 미대를 갓 졸업하고 개인작업실에서 디자인 작업을 하던 예쁘장하고 털털한 성격의 친구였는데, 영화연출도 그 작업의 맥락으로 조금씩 소박하게 해보던 차였다. 물론 그에게도 이번 영화는 지역 영화제작 워크숍 대부분의 수강생들처럼 거의 처음 써보는 시나리오였고, 연출도 마찬가지였다. 어쨌거나 예술적인 호기심이 남다른 친구였기에 이후 제작지원 공모에 선정이 된 것도 놀랄 일은 아니었고, 결국 한여름 땡볕에 미친 듯이 땀 흘리고 변덕스런 장맛비를 한숨과 함께 통과하면서 마침내 한 편의 영화를 무사히 찍어냈다. 그 과정에 나의 시어머니스러운 잔소리가 끼친, 좋거나 나쁜 영향도 분명히 있었겠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막 남자친구와 헤어진 듯한 여자가 있다. 매일 아침, 소주병과 라면 냄비가 머리맡에 굴러다니는 걸 보면 후유증이 좀 심각한 것 같고. 그날 아침에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 냄새 푹푹 풍기면서 현관 마당 앞 고추 모종에 비몽사몽 물을 주고 있는데, 아, 글쎄, 간밤에 누가 고추 모종을 후벼 파서 훔쳐갔지 뭔가. 어머! 충격을 받은 여자는 책상 앞에 앉아서 그 볼품없는 고추 모종을 굳이 훔쳐갔을 만한 사람들의 리스트를 기필코 짜기 시작한다. 그 중엔 옆집에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자기를 귀찮게 하는 복학생 선배도 있고, 파지 주워가면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재미로 사시는 듯한 할머니도 있고, 길고양이에 집착하며 돌아다니는 꼬마도 있고... 마치 소녀 탐정 낸시 드류처럼 사라진 고추 모종을 찾기 위해 용의자들을 추적하면서 하루 내내 동네를 샅샅이 뒤지고 다닌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그래서 결국 고추를 찾는지 못 찾는지는 스포일러라 말 못하겠지만, 도난당한 고추 모종을 찾으러 다닌다는 이 귀엽고 소박한 추리극의 플롯 뒤에는 이 영화의 고통스런 진짜 이야기가 숨어있다. 내가 짐작하는 이 영화의 진짜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고추 모종을 버리려고 애쓰는 여자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면 사람들은 ‘도대체 고추 모종 따위가 뭔데?’라고 묻겠지? 여기서 힌트는, 그것이 열심히 잘 키워보자고 옛 남자친구와 같이 손 붙잡고 사러 갔던 고추 모종이었다는 거다. 

근래 이 친구 또래의 연출자들이 만들어 영화제에 주로 내놓는 단편영화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렇게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깜짝 놀랄 만큼 밋밋하거나 아니면 아예 독창적일 정도로 느껴진다. 어떤 놀라운 테크닉이나 도발적인 테마, 자신감 넘치는 연출로 주목받으려는 시도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여서 더 그렇게 보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서 내 의견 따위를 말하자면, 차라리 그런 시크한 태도야말로 진짜로 주목받아야 마땅한 자세라고 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렇게 소박하고 사소해 보이는 소재에 그윽하게 심어놓는 인간적인 감정들이야말로 제대로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으며, 그래서 나는 그 영화에 ‘유기농 청춘 로맨스’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요즘의 내겐 이런 태도의 영화야말로 감독이 누군지 궁금하게 만들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을 느끼게 만들며 그래서 결국 영화 또한 뭔가 고유한 말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난 아직 그 영화의 완성본을 못 본 상황이라서 그의 영화가 ‘고유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뚜렷한 영화적 장점이 있다고 당장 말할 순 없다. 들리는 이야기론, 생각했던 것보다 영화제 초청실적이 저조하다고 하니 시나리오의 좋은 부분들이 기대했던 것만큼 잘 옮겨지진 않았거나, 그저 밋밋하고 사소하기만 할 뿐인 이야기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 그래,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친구가 실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트릭이나 가식 없이 사람과 세상을 보는 그만의 소박하고 털털한 자세는 어디로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다. 다만, 거기서 좀 더 그윽해지길, 그래서 그 사소해 보이는 세계 속에 진짜 이야기를 지금보다 좀 더 그윽하게 숨겨놓을 수 있게 되면,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질 기회도 그만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고 싶다. 물론, 이건 내가 매일 아침저녁으로 거울 들여다보면서 ‘나는 네가 누구 충고 부터하기 전에 자기 앞가림이나 잘했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이면서 할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제 자전거 타는 시간 좀 줄이고 자주 영화 만들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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