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여행
배창호, 2009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무엇보다 감독 본인이 이 작품을 기꺼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올려 놓을지는 모르겠지만, 배창호 감독의 2009년작 <여행>은 현대 한국영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는데 있어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여행>은 본래 TV용 3부작으로 기획되는 바람에 매회 50분씩 총 2시간30분이라는 다소 긴 러닝 타임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저런 기획전을 통해 소개되는 과정에서(일반 극장배급은 실패했으며 당시는 <부러진 화살> 등 이른바 ‘저예산 상업영화’라는 분야가 관객들로부터 인지되기 전이었다.) 관객들로부터 지루하다는 반응을 전혀 받지 않았을 정도로 드라마의 리듬과 호흡이 뛰어났던 작품이다.
<여행>은 일종의 3부작 옴니버스 영화다. 세편의 이야기는 연결되어 있는 듯 끊어져 있지만 잘 들여다 보면 밀접한 상호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예컨대 세편의 주인공 모두는 제주도에서 살고 있거나 혹은 여기를 찾은 이방인들인데, 첫번째 에피소드의 남녀 주인공들이 제주도를 찾을 때 자꾸 조우하게 되는 묘한 분위기의 여성이 세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이라든가, 아니면 이 둘이 제주도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과정에서 지나치듯 만나게 되는 해녀가 두번째 에피소드에 나오는 주인공의 할머니라는 식이다. 그건 결코 중요한 얘기가 아니지만 이야기의 전체적 얼개를 느슨한 척 연결시키고 있는 모습이 마치 우리들 삶의 한 단편을 보여주는 것 같아 이채롭다. 사실 조금 자세히 들여다 보면 우리 주변의 관계들이란 그렇게 알 듯 모를 듯 연결돼 있는 법이다.
배창호 감독은 이 영화를 찍으면서 짧은 단상을 떠올렸고 그것을 장편의 이야기로 엮는데 성공했다. 일단 두 남녀 사진학과 졸업반 대학생이 졸업작품전을 위해 제주도에 여행을 왔고(1편),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는 여학생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간 엄마를 찾아 육지로 올라가려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는 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엄마를 찾게 된다는 것이며(2편), 남편과 아이의 뒷치닥거리로 일상을 허비(했다고 생각)해 온 한 여인이 제주도에서 이틀간의 꿈 같은 휴식을 보낸다는 이야기(3편)이다.
세편의 에피소드 모두 상업영화권이 구사하는 이런저런 논리와는 멀리 있어도 한참을 멀리 있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바로 그 지점에서 일종의 ‘퓨어리즘(pureism)’, 곧 순수주의를 단단히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모든 영화에 자연주의 맛이 어느 정도 씩은 들어 있다면 이 영화 <여행>은 그런 맛의 순도 100%를 자랑한다. 2009년이라면 <아바타>의 3D가 영화산업을 넘어서서 영화미학의 대세로 등극하던 시대다. 에술보다는 테크놀로지가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시대다. 그런 소용돌이를 물끄러미 쳐다 보면서 배창호 감독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셈이다. 영화란 결국, 영화를 위해 순혈주의적인 무엇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감독이) 만들 수도 없고, (관객들도) 볼 수 없다는 것, 우리는 종래 그 궁극의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다소 훈계조로 ‘징징대거나’, 전형적인 신파조 이야기를 내세우고 있지 않다는 데서 이 영화의 특징이 발견된다. 세편 가운데 2편이 특히 기억의 잔상으로 많이 남는데, 엄마를 찾아 나서는 아이의 이런 저런 과정에서 감독은 오히려 관객들의 누선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자신 앞에서 쩔쩔매는 엄마에게 아이는 울고불고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과거의 문제로 싸우지를 않는다. 엄마는 못내 마음 속 파도를 막아내지 못하지만 아이는, 요즘 아이들 얘기마냥 쿨하게 엄마를 달랜다.
세번째 에피소드에서 가정을 잠깐 ‘버리고’ 나온 중년의 여인이 잊고 살았던 시성(詩性)을 회복하는 과정은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순도 100%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낸 백미의 장면이다. 여자는 벤치에 홀로 앉아 제주도의 풍광을 즐긴다. 홀가분한 것 같지만 마음 속은 여지없이 쓸쓸하다. 어쨌든 지나간 세월은 잡을 수 없으며 그것을 후회한다 한들 소용이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삶은 지속돼야 한다. 그녀는 자신이 곧 아이와 아이의 아빠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오늘의 이전과 이후의 일상은 그 내면과 함께 많이 달라질 것임 도한 잘 안다. 그녀는 자신이 젊었을 적 좋아했던 시를 꺼내 들고 그것을 마음 속으로 낭송한다. 바로 워즈워드의 시, <초원의 빛>이다. “한때는 그렇게 밝았던 빛이 / 이제는 영원히 사라진다 해도 /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 정도의 싯구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영화는 다소 긴 여백을 남기며 시의 전문을 읽어 준다. 그런데 그 전문을 듣는 느낌이 만만치가 않다. 마치 순수문예주의의 복원처럼 느껴진다.
매편의 에피소드가 주인공들이 길을 떠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 것도 배창호 감독의 일정한 의도가 읽혀지는 대목이다. 그는 <여행>의 전작으로 <길>이란 영화를 찍었다. 이 뛰어난 중견 감독이 여전히 길을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의 길, 구도의 길을 찾고 있는 것이다. 길 한가운데 서있는 그는 다소 외로워 보이긴 해도 아직 지쳐있지는 않다. 배창호 감독은 아직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여행>은 배창호의 그런 끝간 데 없는 의지를 다시 한번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숨어있는 걸작이란 바로 이런 작품을 두고 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