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영화걸작선]깊은 밤 갑자기

고영남, 1981

[한국영화걸작선]깊은 밤 갑자기 대표 이미지
90년대 후반 무렵 팬덤을 중심으로 한국호러의 재발견 움직임이 있었다. 일종의 우리 것을 먼저 제대로 짚고 넘어가자는 취지였는데, 지속적인 재발굴과 심야 상영 자리를 통해 몇몇 작품들이 열띤 호응을 끌어냈다. 그 가운데 가장 지지가 높았던 작품이 고영남 감독의 <깊은 밤 갑자기> 였다. 이 영화는 생전 다작을 연출했던 고영남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유난히 장르 색깔을 강하게 가졌던 독특한 작품이었다. 또한 80년대 일련의 공동묘지 시리즈로 대변되는 한을 품은 귀신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이색적인 호러 영화이기도 했다. 

<깊은 밤 갑자기>의 주인공은 중년의 나이로 접어든 선희라는 여자다. 그녀의 남편은 걸핏하면 집을 비우는데, 희귀한 나비를 찾아 전국의 숲과 동굴을 찾아 헤맨다. 어느 날, 남편은 희귀종 나비를 촬영하는데 성공하고, 동료들을 초청해 스틸 사진을 보여준다. 그 자리서 선희는 목각인형 사진을 보고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그녀의 직감은 정확했다. 남편은 출장을 떠났다, 미옥이란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온다. 더욱이 미옥은 사진에서 본 목각인형을 가져와 신주단지처럼 모신다. 아내를 도와 집안일을 맡기는 것이 남편의 생각이었지만, 선희는 미옥의 아름다움에 불안해한다. 남편과 바람이 나는 건 아닌지 전전긍긍하다 병적인 상황에 처한다. 남편과 미옥의 관계를 의심하며 서서히 미쳐가던 선희는 결국 미옥을 살해한다. 

<깊은 밤 갑자기>에서 끔찍한 살인이 벌어지는 동기는 남편과 미옥의 부적절한 관계다. 하지만 불륜에 대한 묘사가 모호하게 이루어진다. 남편과 미옥은 진짜 불륜 관계일 수도 있고, 단순히 편집증에 시달리는 선희의 환각일 수도 있다. 진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 과정이 무척 재미있는데다가 은근히 에로틱하고 팽팽한 긴장감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선희와 미옥의 두 캐릭터는 상반된 매력을 지녔다. 선희는 남부러울 것 없는 여자다. 자상한 남편과 경제적인 여유로움을 가졌다. 그런 그녀가 아무것도 가진 건 없는 미옥에 대한 시기와 질투의 시선을 보낸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미옥의 나신을 카메라에 담는다. 젊고 싱싱한 육체를 노골적으로 과시하고, 이를 바라보는 선희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살인이 벌어지고 난 후 <깊은 밤 갑자기>는 본격적으로 호러의 색깔을 드러낸다. 칼을 든 목각인형이 살아 움직이고 죽은 미옥의 혼령이 겹쳐진다. 선희는 집안에서 그들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인다. <깊은 밤 갑자기>는 심령물로 보이지만, 그 보다는 늙어 가는 걸 두려워하는 여자의 두려움이 만들어 낸 편집증에 관한 공포에 더 가깝다. 

<깊은 밤 갑자기>는 과거에도 그랬지만, 지금 시점에선 단점이 더 많은 영화다. 소재는 참신하고 매력적이지만, 속 알맹이를 채우는 각본은 그리 매끄러운 편이 아니다. 세월의 벽을 넘기엔 불가능해 보이는 대사들도 부지기수다. 게다가 지겨울 정도로 반복되는 만화경 같은 화면 조각내기 효과는 촌스러움의 극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은 밤 갑자기>는 여전히 좋은 장르영화로서의 가치가 있다. 그 중심에 김영애라는 배우가 있다. 그녀는 의심과 불안, 분노와 히스테리에 사로잡힌 선희라는 캐릭터에 몰입해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 입장에서는 원톱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를 맡았으니 자연스러운 결과다. 

몇 번을 다시 보더라도 <깊은 밤 갑자기>는 자기만의 매력을 가진 영화다. 한국 호러영화는 오랫동안 지지를 받는 고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럴만한 자격의 영화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 이유들이 걸림돌이 되었다. 무엇보다 팬덤이 존재하지 않은 것이 치명적이다. <깊은 밤 갑자기>는 90년대 말부터 조금씩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팬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으로 재발견된 영화다. 그들 모두 이 영화가 가진 허술함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긴장감 넘치는 심리적 묘사와 라스트의 박력이 단점을 만회한다.

관련 영화인

불러오는 중입니다.

관련 영화글

불러오는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