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시
이창동, 2010
이창동의 <시> 후반부에 보면, 영화 내내 시를 쓰려 고민하던 주인공 양미자가 드디어 「아네스의 노래」라는 작품을 완성해 내놓는다. 이 작품은 은근슬쩍 걸작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 자체가 걸작이라는 뜻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하려고 하는 말은 「아네스의 노래」가, 양미자와 같은 환경 속에서 교육을 받고 살아온 사람이 자신의 진심을 담아 시를 썼다면 딱 나올 법한 그런 작품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제목부터가 그렇다. 자살한 소녀를 가톨릭 신자로 만들었던 건 아마 주인공 소녀에게 서구식 이름을 붙이는 예스러운 멋부림을 만족시키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시는 영화가 상영되자 공식 홈페이지에서는 올망졸망 촌스러운 꽃그림을 배경으로 한 시의 그림 파일을 배포했는데, 그 역시 시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네스의 노래」의 존재는 이중적이다. 시를 쓰는 양미자의 관점이 있고, 그 위에서 양미자와 시를 보는 이창동의 관점이 있다. 그리고 꼭 이런 구조는 아니더라도, 이와 같은 이중성은 <시>라는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아네스의 노래」가 걸작을 의도한 것이 아닌 것처럼, <시>에서 보이는 동기나 행동은 늘 겉으로 드러난 것과 같지는 않다. 그리고 여기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교양이 부족하고 구닥다리 5,60년대 문학소녀 감수성을 아직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감상적인 할머니처럼 보이는 양미자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가혹하고 냉정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은근히 많은 사람들이 양미자를 깔보는 것 같다. 그 때문인지, 그들을 양미자의 행동과 생각을 최대한 단순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이에 따르면 양미자는 손자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의무감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눈물을 머금고 손자를 포기하는 슬픈 할머니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를 잊고 있다. 양미자는 시를 쓴다. 단순히 감상적인 단어들을 연결하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던 이 시도는 손자가 친구들과 함께 같은 나이 또래의 소녀를 성폭행했고 그 소녀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전환점을 튼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양미자가 자신의 윤리학을 시인의 미의식과 결합했다는 것이다. 보통 할머니들은 손자가 아무리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일단 그를 보호하고 그의 편을 들 것이다. 이들에게는 무엇보다 핏줄이 먼저이다. 하지만 시인이 된 양미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당연했을 이 논리를 거부한다. 그리고 시인의 새로운 가치관 안에서 이 사건을 재검토하는데, 여기서 아름다움 ? 진리 ? 정의는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며 거의 같은 비율로 움직인다. 관객들은 마땅히 아름다워야 할 시와 잔인하고 더럽기 짝이 없는 현실의 대비에 주목했지만, 이 영화에서 양미자가 통과하는 과정은 어느 시대, 어느 진지한 시인에게나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이었다.
<시>는 시인이, 아니 넓은 의미로 진정한 예술가들이 얼마나 가혹한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의심난다면 양미자가 이후 손자를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냉정하게 변해가는지를 보라. 처음에는 손자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하던 할머니가 후반부엔 마치 원숭이를 연구하는 행동심리학자처럼 죽은 소녀의 사진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손자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구한다. 그리고 그 실험을 통해 손자가 자신과 소통이 불가능하며 아무런 가치가 없는 동물임을 확신하는 그 순간, 양미자는 가차 없이 손자를 포기해버린다. 마치 운율에 맞지 않는 단어나 불필요한 캐릭터, 끝을 맺지 못할 사념을 포기하는 것처럼.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한 소녀를 대변하는, 문학소녀 감수성이 폭발하는 시를 쓴다.
여기서부터 양미자에겐 한국 관객들이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적 면은 찾아볼 수도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관객들은 강간범 자식들을 구하기 위해 돈을 모아 피해자 부모의 입을 막으려는 부모들의 모습을 더 인간적이라 볼지도 모른다. 당연한 것이, 여기서부터 양미자는 인간이 아닌 여신의 영역에서 행동하고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종종 양미자가 남겨놓고 떠난 세계의 사람들이 이 이해할 수 없는 파국 속에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당황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들은 끝끝내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시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