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화차
변영주, 2012
감독에게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는, 일종의 ‘상태’라는 게 있다. 그것은 한 개인이 닿을 수 있는 최상의 컨디션에 여러 가지 외부 요인들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발생하는 공기 같은 것인데, 감독을 비롯해 참여하는 모든 배우와 스태프들이 재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시너지의 촉매제 역할을 한다. 누군가는 그 ‘상태’의 숙주로 아예 태어나기도 한다. 그리고 꾸준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양질의 에너지를 자신의 팀에 지속적으로 전파하며 좋은 영화들을 부침 없이 만들어낸다. 보통 천재 내지는 거장이라고 분류되는 소수들이 그렇다. 그 특수한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감독들은 안타깝게도 그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 조절할 수가 없다. 매뉴얼이라는 게 존재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유기농 건강 식단으로 다다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꾸준한 운동이나 맹렬한 독서 따위로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상태 안에 놓이기를, 밖으로 내쳐지기를 반복하며 재능의 기회와 실책 사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뿐이다. 영화 작업은 그래서 고되다.
변영주 감독이 <화차>의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분명히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전작에 대한 본인의 열패감이 컸었고, 각본 집필 내내 스스로에 대한 불신과 자학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결과적으로 화차 최종 시나리오를 탈고하는 데까지는 몇 개월 혹은 몇 분기 정도의 상식적인 지각이 아닌 몇 년 단위의 불가사의한 지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메가폰을 7년 만에 잡게 된다. 마침내 7년이라는 시간은 이 중견 감독의 ‘상태’에 대한 외부적인 평가를 야박하게 매기도록 만들었다. 적은 예산과 빠듯한 일정. 이야기의 특성상 공간 이동이 잦고 시점과 시간의 변화가 유독 많은 작품으로서는 치명적인 핸디캡이었다. 심지어, 원작은 미야베 미유키의 베스트셀러 소설이었다. ‘변영주’를 둘러싼 의심에 대한 답만 제시한다고 끝나는 게임이 아니었다. 원작의 명성에 견주어 ‘왜 한국에서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명쾌한 답안도 동시에 필요한 일이었다. 이 정도로 우려와 의심이 팽배한 토양 위에서 감독 스스로 좋은 ‘상태’를 자가 발전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화차’는 애당초 충무로 기대작이 아니었다.
결과 값은, 말하자면 보기 좋게 호쾌한 쪽이었다. 영화는 선언적으로 훌륭했다. 방대한 원작의 군살을 발라낸 안목이 좋아 기초 공사는 튼튼했고, 위에 심어진 캐릭터들은 수입품 느낌을 깔끔히 지워냈다. 다소 복잡할 수 있는 이야기의 균형이 특히 잘 잡혀있는데, 원작과 달리 약혼자 문호(이선균)를 주인공으로 위치 이동했던 절묘한 노림수가 그 일등 공신이었다. 약혼자의 감정을 자연스레 따르며 퇴물 형사 종근(조성하)의 수사로부터 도움을 받게끔 설계된 이야기는, 관객으로 하여금 경선(김민희)을 느끼고 동시에 사건을 읽어야만 하는 양 쪽의 노고를 부드럽게 누그러뜨렸다. 마침내 모든 감정과 수사의 플롯이 하나의 꼭짓점으로 모이게 되는 후반으로 갈수록 감정이 휘몰아치며 자칫 과잉의 신파로 빠지기 십상이었지만, 그 땐 차갑고 지적인 음악이 꾸준히 경계하며 솜씨 좋게 중심을 잡아준다.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특성상 맹목적인 핸드 헬드로 긴장감을 보충하려는 함정에도 역시 쉽사리 빠졌을 법 하지만, 촬영은 테크닉에의 과욕을 덜어낸 대신 명확한 콘셉트하에 쇼트 바이 쇼트, 우직한 미장센을 마침내 지켜낸다.
사실상 가장 위험했던 함정은, 이 이야기의 주제에 있었다. 원작은 일본의 사회파 소설이었고, 감독은 ‘낮은 목소리’의 변영주였다. 다시 말하자면 메시지를 내세우며 웅변 형식으로 영화의 모자란 미덕을 손쉽게 충당하기에 적당한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사회를 통해 개인을 읽는 원작의 방식을 거꾸로 택했다.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던 대목이었을 것이다. 보다 더 깊이, 직접적으로 사회상을 담아낼만한 그릇이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영화는 주제적인 측면보다 장르의 컨벤션에 더 무게를 두는 용단을 내린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존재 증명이 필수였던 감독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렸던 이 선택을, 나는 지지한다. 이것이 훨씬 더 감독에게 현실적이고 관객들에게는 보다 영화적이었을 거라고, 나는 읽기 때문이다.
결국 돌아보면 너무나 긴 시간이었고, 온통 부비트랩이었다. 그 사이 감독은 수도 없이 많은 실책을 저지를 수 있었다. 나빠도 한참 나빠질만한, 피로감이 묻어 나와도 흥건했을 법한 조건들이었다. 그러나 불가능이라고 여겨져 오던 그 자가 발전을 감독은 마침내 해냈다. 그리고 악에 바치지 않은 자연스런 방식으로 ‘좋은 상태’에 접어들었고, 걸맞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일련의 과정들은 사실, 작품 자체 뿐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바깥을 읽었을 때 훨씬 더 크게 확장되는 감동의 기록이다. 물론, 나는 영화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 읽는 것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다. 감독으로서의 내게 영화는 단지 하나의 작품이 아닌 그런 거대한 과정, 그 전부를 포함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영화는 몇 가지의 기준점으로도 또렷이 남게 될 것이다. 일단 김민희 조성하를 비롯한 배우들의 입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든 영화로서 그럴 것이고, 배우 이희준이나 김동영 촬영감독 같은 새롭고 젊은 피를 충무로에 수혈한 공로로서도 그럴 것이며, <낮은 목소리> 이후 오랜만에 ‘영화제작소 보임’이라는 반가운 이름을 부활시킨 의미로서도 그러할 것이다. 무엇보다, 영화 산업권 내에서 생존해내기 위해 오늘도 척박한 환경과 고통스럽게 싸우고 있는 수많은 감독들에게 하나의 비전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맥락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미래는 이렇게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화차를 기점으로 변영주는 비로소 영화를 즐기면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라고. 재능 있는 감독이 자신의 재능을 누리고 만끽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큼 큰 재미가 또 있겠나. ‘좋은 상태’의 변영주는, <화차>가 겨우 첫 페이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