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혈맥
김수용, 1963
서울역과 마주보고 있는 남산의 끝자락 언덕. 후암동이라 불리는 곳이다. 빌딩들이 들어찬 그곳의 50년 전 모습을 상상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영화 혈맥은 서울역 건물이 오른쪽에 보이는 언덕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70년대에 대우 빌딩이라 불리던 건물 뒤편의 어느 언덕이리라 짐작이 가는 곳이다. 언덕 아래 바로 앞에는 서울역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남대문 시장과 좀 더 가면 종로통이 있고, 왼쪽으로 과거 일본인들이 살았던 적산가옥이 즐비한 청파동을 지나면 용산 미8군부대가 있다. 전쟁통에 월남한 이북내기들이 사고무친의 서울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자리 잡은 곳이다. 그들은 미군부대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레이션 박스를 이어서 집을 만들고, 미군이 먹고 버린 통조림 깡통을 편편하게 펴서 함석판을 만들어 내다 판다. 서울역과 미군기지 근처에서 주워온 담배꽁초를 모아 담배를 만들어 팔고, 서울역 건너편 염천교에 좌판을 늘어놓고 술과 안주를 판다. 그들은 자식들이 용산 미군부대의 경비 또는 청소부로라도 취직했으면 하고, 과년한 딸은 창을 가르쳐 종로통 요정의 기생을 만들려 한다. 좋고 나쁘고 따질 겨를이 없다. 먹고 살아야 한다.
아무리 용을 쓰고 버둥거려 보아도 가난은 끝이 없다. 굵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절망에 빠진 곰 같은 신영균이 입을 꾸-욱 다물고 담배를 마는 그의 등 뒤에서 병든 아내의 신음소리와 늙은 어머니의 기도 소리가 들린다. 담배 부스러기를 모아 만든 쓰레기 담배 따위를 내다 판돈으로는 아내의 병원비는커녕 식구들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다. 그도 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은 이북내기인 그가 비집고 들어 갈 틈이 너무나 없다.
사내들의 머리채를 붙잡고 악다구니를 쓰는 함경도 아즈마이 황정순. 이북에 버리고 온 전답들이 눈앞에 어른거릴 때마다 그녀의 가슴속에서 응어리진 화가 불끈 솟아오른다. 남편은 월남한 이후로 반편이 되어 방구석에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다. 이제 그는 사내구실을 못한다. 뭔가 한쪽이 휑하니 달아나 버린 것이다. 나라도 치마 깃을 바짝 올리고 돈을 벌어야 한다. 언제 내가 염천교 길바닥에 술과 안주를 늘어놓고 술장사를 할 줄 알았나?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 없다. 살아야 한다. 그래서 딸년을 붙잡아 놓고 회초리를 들어가며 신고산 타령을 부르게 한다. 돈 많은 홀아비라 말을 듣고 왔는데, 이건 집이 아니라 토굴이고 홀아비가 아니라 할애비다. 벙어리 조미령은 이 병신 팔자가 고쳐질 수 있는 팔자가 아니란 것을 안다. 눈을 끔뻑거리며 눈치를 보다가 눈앞에 밥이 있으면 내일 일은 알 수 없으니 먹어 두어야 한다. 꾸역꾸역 배가 터질 때까지. 그리고는 김승호가 감춰둔 돈을 훔쳐 언덕길을 종종걸음을 치며 내려간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면서. 학삐리 최무룡은 사랑했던 김지미가 양공주가 되어 있는 처참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형 신영균과 형수를 볼 때마다 미칠 것 같다. 사람 구실을 해야 하는데, 이곳에서 어찌해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는지 도저히 알 길이 없다. 젊은 신성일과 엄앵란은 무조건 이 곳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다. 이곳에 있다가 부모들처럼 삼팔따라지 인생으로 이북에 두고 온 재산과 산천만 그리워하며 미군이 버린 쓰레기를 뒤지다 죽을 팔자다. 한강을 건너 영등포에 그들의 미래가 있다. 그러나 영등포의 공장이 과연 그들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선사 할 것인가?
이북에서 내려온 나의 할아버지는 건넌방에서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창밖을 바라보며 담배만 피웠었다. 할아버지는 손자들이 놀러 가면 같이 겸상을 하고 싶어 했지만 할머니의 불호령에 건넌방에서 따로 외로이 밥상을 받았었다. 할머니는 평안도 사투리로 악다구니를 쓰면서 사내들에게 지지 않고 해보자고 두 팔을 걷어붙이고 덤볐었다. 이 영화를 보고 어린 시절 할아버지 집에서의 기억이 살아나고 그들이 왜 그랬는지 아주 조금 이해가 간다.
패기로 가득했던 젊은 날의 김수용이 연출한,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곳에서 일어나는 인간군상의 욕망의 지형도를 그려낸 이 영화를 보다가 울컥 영화라는 것은 정말 위대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