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사나이 삼대
임권택, 1969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활극 액션 영화의 현저한 융기는 장르의 국제적 경향이 로컬 시네마의 정체성과 교착되어가는 진기한 풍경을 보여준다. 서부극과 필름 누아르,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한국적 수용은 관객의 기호에 따라 장르의 양식과 스타일이 어떻게 내셔널 시네마의 아이덴티티로 변환되어가는 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낳았다. 임권택 감독의 <사나이 삼대>(1969)는 이러한 한국영화계의 정황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작품이다. 장르 연출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임권택의 액션 감각은 <황야의 독수리>(1969), <의리의 사나이, 애꾸눈 박>(1970),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 같은 평판작들에 뚜렷이 새겨져 있지만 나는 그 시절 최고작은 <사나이 삼대>라고 생각한다.
일본 동경에서 조총련 계 하수인 조직의 행동대장을 맡고 있는 금철(김희라)은 절친했던 친구 상현(강민호)이 조직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조직을 이탈하려 한다. 보스 호남(박노식)은 민단과의 세력싸움에 전투력이 탁월한 금철을 필요로 하지만 그가 명령을 거부하자 친구의 여동생이자 금철의 아내인 미연(문희)을 납치한다. 과거와 절연하고 새 삶을 찾으려는 금철은 연인과의 미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이게 된다. 서사의 표층은 일본 야쿠자 영화의 익숙한 플롯을 따라가고 있지만 <사나이 삼대>는 당대 한국영화로서는 드물게 필름 누아르의 비전과 스타일을 뚜렷이 구현한다. 조직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암흑가를 떠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갱스터의 고단한 여정을 그린 플롯은 야쿠자 영화의 전형이다. 임권택 감독은 여기에 누아르 적 인물과 스타일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충만한 장르적 쾌락을 창조하고 있다. 갱스터는 비극적인 영웅이고, 도덕적 모호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며, 제도화된 법 집행기관인 경찰은 정의를 실현하는데 무력하다. 금철과 호남의 스토리를 좇는 형사반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보다는 관찰자에 머문다. 장면의 대부분이 밤이나 실내에서 벌어지고, 인물들은 퇴락했으며, 운명론적인 주제로 기우는 이 영화에는 창조적인 어둠의 장르인 누아르의 원형질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곳곳에 있다.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미리 결정된 운명, 무기력의 정서가 팽배하고, 불안정한 사선 앵글은 위태로움을 조장한다.
<사나이 삼대>는 임권택이 얼마나 뛰어난 장면 연출가인지를 입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계산적인 커트의 분할과 표현주의적인 조명의 사용, 적재적소에서 끼어드는 대담무쌍한 클로즈업, 인물의 심리에 동기화된 시점 쇼트, 반복 재생되는 음악의 라이트모티프(전설의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황문평이 음악을 맡았다) 등 버려질 것이 없는 형식적 완결성을 구축하고 있다. 풋풋한 신인 시절 야성미가 넘쳤던 김희라의 생기와 절도 넘치는 박노식의 액션도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무엇보다 몸담았던 호남의 조직으로부터 곤죽이 되도록 린치를 당한 뒤 비척거리며 거리를 걷는 금철의 육체 위에 어리는 낙오자 정서는 잊히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쇼트의 구성적 긴장이 감각되는 장면도 여럿 있다. 상황에 대한 긴박하고 압축적인 제시, 어둠과 그림자의 적절한 활용, 공간의 심도를 활용한 맥락화는 스타일이 주제를 밝히는 누아르적인 룩의 전범이다. 영화가 열리자마자 자동차를 탄 네 명의 괴한들에게 상현이 쫓길 때 카메라는 자동차에 탄 이들의 시점과 도주하는 상현을 오가면서 긴박한 상황을 조성해낸다. 상현의 초조한 얼굴과 좁은 골목의 담벼락에 어리는 그림자만으로 우리는 별 설명 없이 필름 누아르의 검은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필사즉생의 각오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 금철이 호남의 아지트에 잠입했을 때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다가 어둠 속에서 스윽 나타나면서 작렬하는 육박전, 암전된 사무실의 어둠 아래서 금철과 호남이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도 뛰어나다.
장르 캐릭터에 대한 명징한 구축 위에 거칠고 눅눅한 누아르의 비전을 이식한 <사나이 삼대>는 오늘날의 임권택 영화를 떠올렸을 때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상을 전해준다. 장르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나 정확한 쇼트의 분할과 장면전환, 공간(특별히 심도)에 대한 통제와 연출의 능란함에서 대가의 뿌리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