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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변신 자동차 또봇>, 한없이 낯설거나 한없이 익숙한 것에 대한 불편함

[칼럼]<변신 자동차 또봇>, 한없이 낯설거나 한없이 익숙한 것에 대한 불편함 대표 이미지

B급 영화는 장르의 관습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관습을 과하게 증폭시키거나 작동 방식을 변조함으로써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전략이 장르의 와해나 부정으로 향하지는 않는다. 또한 B급이라는 타이틀은 장르가 안착하고 있는 시장의 질서를 전복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다만 A급이 막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시장에서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여서 장르에 교란 신호를 일으키면서 해당 장르와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B급은 장르와 시장의 자기 부정이 아니라, 그것들의 자기 긍정을 한층 신선하게 보여준다. <변신 자동차 또봇>은 변신 로봇이라는 애니메이션 장르의 B급 전사이다. 어쩌면 꽤나 예외적인 존재감으로서 말이다. 그런데 이 B급 변신 로봇을 대할 때에는 뭔지 모를 불편함이 있다.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또봇은 장난감 회사가 기획한 상품이다. 그래서 장난감으로서의 또봇을 위해서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진다. 혹여 장난감이 애니메이션에 선행한다고 해서 불쾌해한다면 그건 애니메이션의 상황을 잘 모르는 오해에서 초래된 것일 수 있다. 굳이 무한한 파생 상품의 원천으로서의 애니메이션 산업이라는 뻔한 경제 모델을 끌어올 필요는 없다. 애초에 애니메이션은 그 자체로 이득을 내는 경우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기획의 출발점이 장난감이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도 없다. 장난감은 그 자체로서 미적 향유의 대상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따라서 우리가 굳이 또봇을 통해서 장난감을 팔기 위해서 애니메이션을 소비해야 하는 상황에 분개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뒤집어 생각하는 게 그나마 기분을 덜 상하게 할 것이다. 장난감을 샀는데, 애니메이션이 더불어 딸려온다는 식으로 말이다. 괜찮지 않은가? 장난감을 애니메이션에 끼워 파는 게 아니라, 장난감을 사면 애니메이션이 덤으로 온다는 것이다. 때론 조삼모사의 발상이 삶의 스트레스를 덜어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또봇이라는 애니메이션 작품이 주는 당혹스러움의 일정 부분은 제작진 쪽 설명을 통해서 완화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목소리. 제작진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의도했다고 한다. 즉 매끈한 어른 성우 대신 어린이의 목소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만약 이러한 제작 의도가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에서 유명 연예인(의 목소리)을 고용하여 홍보 효과를 노리는, 하지만 그래서 제작비가 상승하게 되는 점을 비판하고, 나아가 기존의 어른 성우가 만들어내는 작위적인 ‘어린이다움-목소리’를 비판한 것이라면, 일견 기특한 발상으로 평가할 수 있을 테다. 애니메이션에서의 사운드는 그것이 목소리이든 음향 효과이든, 애초에 철저히 진공-묵음 상태에서 그 어떠한 외부의 실질적/실재적 지시 대상이 없이 철저히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채워넣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제작 방식을 따라 관성적으로 채워진 사운드에 도발적인 문제의식을 지닌다는 것은 꽤나 높이 살만하다. 그런데 정말 그것이 의도대로 (B급의) 미적 성취를 이루었는지는 좀처럼 수긍하기 힘들다. 목소리에 대한 실험뿐만 아니라 사운드의 실험까지도 의도하였는지, 또봇은 웬만한 사운드 실험을 추구하는 영화 이상으로 우리의 청각적 관성을 테스트한다. 누군가는 당혹스런 사운드의 문제가 초기의 한정된 제작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입되었고, 이후 성우의 교체가 자칫 시청자의 혼란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유지된다고 설명해준 적이 있다. 나는 그런 설명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성우 목소리의 변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시청자라면, 매 시즌마다 로봇 캐릭터의 수정 모델이나 전혀 새로운 로봇 캐릭터의 등장 (혹은 런칭)에도 불편해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봇을 바라보는 나를 여전히 우울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또봇이 우리를 에워싸는 방식에 있다. 무려 열 개의 채널 속에서 무한히 반복 상영되는 상황은 우리가 또봇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다채널 장악은 국산 애니메이션 방영 쿼터제 덕에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다. (눈치챘겠지만, 쿼터제는 결코 창작의 다양성이나 작품의 제작 편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국내 자동차 기업의 모델을 반영한 또봇이 무한 증식하면서 되풀이된다. (그리고 또봇의 열풍에 뒤늦게 합류한 다른 자동차 기업은 카봇이라는 것을 내밀고.)

그래, 불편한 것은 어쩌면 또봇이라는 로봇 완구나 애니메이션이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자국’이라는 국민경제의 울타리 속에서 별다른 대안적 선택권 없이 일방적으로 제시되는 상품들을 기꺼이 구매해줘야 하는 상황에 놓여있다. 그것이 ‘국민 경제’를 살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대고 순진하게 글로벌한 상품 리스트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했다가는 돌팔매 맞기 쉽다. 결코 그러한 시장 논리가 정작 소비자의 만족으로 이어지지도 않고, 내수 시장의 성장이나 안정화와도 무관하며, 나아가 자국 노동자의 고용 불안을 해소하거나 노동 환경의 개선을 이끄는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수십 년을 지배해온 해괴한 경제 논리의 자기 최면 속에서, 즉 국민 경제의 성장과 발전, 나아가 ‘Made in Korea’라는 기치 아래에서 세계로 진출하는 수출 산업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닥치고 스스로 호갱님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비정상적인 경제 이데올로기를 정상이라고 믿게 만들고야 마는, 소비자를 국가 경제를 위해 헌신하게 만드는 폐쇄회로 속의 기이한 동원체계는 또봇도 예외는 아닌가 보다.

애초에 변신 자동차라는 것은 그저 애니메이션 텍스트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가 등장하였을 때, 그 시기는 바로 일본 자동차 산업이 미국 시장을 침공하던 시기였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이 맞서는 전략 중 하나는, 변신 자동차의 위용 속에 노출되는 자국 자동차 모델을 통해 현재의 시청자를 미래의 구매자로 포섭하는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텍스트를 장난감으로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본의 장난감 회사 간의 제휴가 필요했다.

기이하게도 또봇은 이러한, 시장의 지배를 둘러싼 치열한 전략과 꼼수 또한 자신의 이야기 속에 담아 둔다. 예컨대 아이들의 입맛을 장악한 떡볶이 체인의 음모와 이에 대한 고발, 그리고 그 고발로부터 세간의 관심을 돌리고자 벌이는 또 다른 사건들 등등. 또봇은 자신의 상품을 떠받치는 어린이 소비자의 취향을 떡볶이라는 반복 코드를 통해서 끌어들임으로써 일상의 친숙함을 성취해낸다. 떡볶이로 상징되는 어린이 세계에서 어른들이란 씨도 안 먹히는 잔소리꾼으로서, (쪼잔한) 과대망상에 휩싸이거나 무기력할 뿐이다. 실제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어쩌면 한심하고 답 없는 어른이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들이 원하는 또봇을 사주는 일 밖에 없다.

또봇은 아마 새로운 독해와 평가를 통해 훗날 컬트 텍스트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텍스트의 심오함은 애석하게도 1차 타겟인 어린이들에게는 다소 무리일 듯싶다. 아마도 장난감과 애니메이션 텍스트를 분리시켜 즐길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평가일 테다. 다만 작품의 본래 1차 목표인 장난감 판매를 꾸준히 해나가기 위해서라도 텍스트는 충실하고, 상품을 둘러싼 서비스는 원활했으면 좋겠다. 문화 산업이든, 창의 산업이든, 창조 경제이든, 그게 상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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