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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그들도 우리처럼

박광수, 1990

[한국영화걸작선]그들도 우리처럼 대표 이미지

‘젊은 감독들 시나리오 발로 쓴다’ 1990년 1월6일치 <한겨레신문> 문화면 머릿 기사는 “책상 머리에서 시나리오를 쓰던 시대는 지났다”는 충무로의 움직임을 소개하고 있다. 이 보도에 따르면,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은 “연출부의 치밀한 자료조사와 공동작업에서 시나리오가 태어났”고, 황규덕 감독의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는 “자료조사에만 7개월이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학생들과 현직 교사들의 참여가 활발”했다. <우리 사랑 들꽃처럼>은 노동소설 전문 작가가 붙어 각색을 했음에도 김동빈·홍기선 감독은 따로 한달동안 “서울 구로공단과 부천 공장지대를 돌며 현장 취재를 했다”. 박광수 감독 또한 <그들도 우리처럼>의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연출부 등과 함께 강원도 태백, 정선, 사북, 고한 등의 탄광촌을 전전했다. 

20년 전, 감독들의 자진 ‘하방’(下放)은 단순히 사실적인 묘사를 더하기 위한 창작인들의 개별적인 노력이라기 보다 새로운 영화를 위한 선언이었다. 1988년부터 시작된 할리우드 직배는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오락이 아닌 문화운동으로 사고하는 불온(?)한 이들을 충무로가 끌어안게 만들었는데, <성공시대>의 장선우 감독과 <칠수와 만수>의 박광수 감독이 1988년에 동시에 데뷔한 건 우연이 아니다. 지식인 화자 혹은 주인공이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박광수 감독의 <그들도 우리처럼>은 흔히 ‘사회비판적 리얼리즘’이라 부르는, 그의 궤도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들도 우리처럼>의 김기영은 <베를린 리포트>(1991)의 성민(안성기)이자,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의 김철(안성기)이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의 김영수(문성근)이기도 하다. 

사회운동가인 김기영(문성근)은 시위주동 혐의로 수배중이다. 강원도의 폐광촌에 숨어들어간 기영은 한 연탄공장에 간신히 위장취업한다. 기영이 일하는 연탄공장 사장의 아들인 성철(박중훈)은 걸핏하면 주먹을 휘두르는 망나니다. 탄광촌의 다방에서 일하며 몸을 파는 영숙(심혜진)을 끼고 사는 성철은 영숙이 기영에게 호감을 품게 되자 기영이 보는 앞에서 영숙을 폭행한다. 참다 못한 기영은 성철과 싸움을 벌이고, 경찰에 끌려간 기영은 신분이 노출될 위기에 처한다. 멜로드라마의 흔한 삼각관계를 끌어왔지만, 박광수 감독은 비극으로 끝나고 마는 세 남녀의 관계를 얽힌 치정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산업합리화조치로 탄광들이 문을 닫고, 임금체불이 잦아지자 광산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는 영화의 배경 아래서 도드라지는 건 인물들이 지닌 고립에 대한 두려움이다.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잿빛 탄광촌에 방치된 세 인물들은 모두 내일에 대한 불안을 떠안고 있다. 기영에게 탄광촌은 도피처인 동시에 감옥이다. 영숙은 한달만 머물 것이라고 작정했지만 탄광촌을 좀처럼 떠나지 못한다. 성철 역시 아버지의 손바닥에서 한시라도 벗어나고 싶어한다. 이들을 처음 비추는 장면에서 유영길 촬영감독이 포착한 또렷한 그림자들은, 이들의 일그러진 불안을 명징하게 드러내는 표식이다. 성철은 왜 일면식도 없는 기영에게 이유없이 호의를 베푸는가. 영숙은 왜 기영의 무거운 침묵에 조금씩 끌리는가. 기영은 왜 욕설이 끊이지 않는 막장의 삶에서 희미하게나마 웃는가. 박광수 감독이 제목을 두고 “그들도 ‘우리처럼 살고 있다”고 간명하게 답했을 때, ‘그들’과 ‘우리’를 잇게 하는 연대는 계급적 각성이 아니라 위로와 연민의 정념이다.

<그들도 우리처럼> 개봉 당시 일부 평자들은 “행동하지 못하는” 지식인의 패배적인 감상을 문제삼았다. 하지만 이러한 반응은 지금 와서 보면 이념과 당위에 사로잡힌 관념적이고 모호하고 섣부른 불평이 아닐까 싶다. “민중과 지식인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는 기영의 질문은 영화와 현실을 분리해서 사고하지 않았던 박광수 감독의 가설이자, 이후 그의 작품에서 강박적으로 등장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칠수와 만수>부터 <이재수의 난>(1999)에 이르기까지 원환(圓環) 구조를 띤 박광수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나약하고 무력한 지식인은 현실을 탐색하는 진지한 우회로이자 언제가 사라져야 할 매개물이었다. 그가 세운 가설이 신기루였음이 현실로 드러난지는 꽤 오래됐다. 하지만 기영이 말했던, 미약한 희망의 근거들이야말로 여전히 우리의 삶을 유지케 하는 이데올로기임을 부정하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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