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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거미숲

송일곤, 2004

[한국영화걸작선]거미숲 대표 이미지

사고를 당해 수술을 받은 강민. 그가 깨어나 처음 한 말은 거미숲에서 두 사람이 죽었다는 것. 그리고 발견된 사체는 강민의 상사와 강민의 연인. 그로 인해 강민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르지만 그의 조각난 기억과 지워진 시간은 도무지 맞춰지지 않는다.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이리저리 맞춰보며 사건과 자기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던 강민은 ‘거미숲의 전설’에 대한 제보를 받고 취재를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초현실적인 일련의 일들과 마주치면서 자신의 머리 속에 헝클어져 있는 기억의 끈을 잡아낸다.

송일곤 감독의 <거미숲>은 산문이 아닌 시다. 따라서 헐리우드 스타일의 내러티브 영화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하고 받아들이기 힘든 구석이 있다. 제목과 시놉시스만 가지고는 스릴러 영화의 범주에 들지만 실제로 영화의 전개는 시간의 흐름을 좇아가며 사건을 해결해가는 쾌감을 던져주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내면에 저장되고 각인된 무엇을, 그 조각을 따라가며 하나씩 맞춰가는 고난도의 퍼즐 같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하고 모든 일의 발단이며 기억의 혼재 그리고 일그러진 시공간이 되는 거미숲은 결국 강민의 무의식과 다름 아니며, 그의 의식이 교묘하게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억의 조각들을 편집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항해서 혹은 그에 상관없이 기억과 경험을 뭉뚱그려 그러안고 있는 무의식으로 고개를 돌려 내면을 직시하게 하는 근원인 것이다. 숲은 신비로운 곳이다. 숲은 아늑하고 아름다운 곳인 한편 위험하고 불안한 곳이다. 숲으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보호와 안식을 주기도 하지만 숲에 들어온 사람을 위협하고 출구를 막아버리기도 한다. 그런 숲은 결과적으로 강민의 무의식 속에서 해체되고 재편집된 일련의 사건들과 무의식 속에 녹아있는 기억을 의식의 표면으로 떠오르게 하는 비밀스럽고 은밀한 공간이 된다. 

<거미숲> 개봉 즈음, 송일곤 감독과 인터뷰를 하면서 “당신의 영화에는 어딘가 구도적인 느낌이 있다”고 말했던 기억이 있다. <꽃섬>이후 <거미숲>에서도 실재하는 공간 같지만 실재하지 않는 공간,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꿈을 꾸는 것처럼 단편적인 장면들이 툭툭 던져지는 전개, 내러티브가 있고 줄거리가 있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어서 헐리우드 영화보다는 미장센을 중시하는 유럽의 영화와 많이 닮아있는, 그리고 인간의 외면으로 사건을 돌리지 않고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법이 시와 구도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감독 스스로는 구도적인 의도로 영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해 존중감을 갖고 있고 안간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눈을 가진 그의 무의식은 아마도 그런 부분을 영화에 반영해 놓았던 것이리라.

그 숲에 가면 기억은 길을 잃는다,던 영화의 카피처럼 영화는 당신에게 설명하거나 당신을인도 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당신은 강민과 함께 숲-무의식을 헤매며 강민의-당신의 기억의 단편들을 손에 쥐고 혼돈과 절망 속에 빠질 것이다. 그리고 문득 강민의-당신의 기억이 의식의 표면위로 떠오를 때 예리하고 또렷한 통증과 슬픔을 함께 느끼게 될 것이다. <거미숲>은 한국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무의식 속을 구도자처럼 걷게 만드는 드문 영화이자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작품이다. 사실 우리 인간은 나약하다. 나약해서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스스로의 무의식과 마주치는 것을 두려워한다. 아니 무의식의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무의식의 세계는 이성적으로 설명되고 판단할 수 있는 코스모스가 아니라 카오스의 세계이기 때문에. 하지만 마주보기를 두려워하지 말자. 우리 자신의 본질과 마주쳐 극복해야 우리 자신을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시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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