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세기말
송능한, 1999
1999년 12월 11일 개봉한 <세기말>은 어정쩡한 평가를 받았다. 20자평과 평론가들을 싸잡아 모욕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지나치게 많은 ‘말’들로 ''''''''''''''''세기말‘을 대변하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특히 에필로그는 모호했다. 모라토리엄과 무도덕과 모랄 해저드의 세기말을 살아가는 관객에게, <세기말>의 결말은 난데없었다. 미완성 같은 느낌이 있었다.
야심에 비해 <세기말>이 부족했을 수는 있다. 당시 인터뷰에서 송능한은 ‘인과율을 가진 하나의 이야기만 하는 게 거짓말’ 같은 느낌이 들어 ‘단편들을 섞고 교차시키면서 전체를 벽화처럼 그려내는’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인과율을 가진 이야기를 해체시키는 것. 두 번째 챕터 무도덕(Amorality)에서 여대생 소령은 원조교제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아버지의 병원비와 오빠의 고시 학원비까지 떠맡은 소령이 졸부와의 섹스로 받은 돈은 오빠에게 건네지고, 오빠는 도박장에서 탕진한 돈은 다시 도박장 주인인 졸부에게 돌아간다. 그러니까 소령은 천민자본주의의 주박에 강력하게 포박되어 있는 존재다. 그녀의 근원인 가족을 끊어내기 전까지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하지만 가족이 없는 먼 외국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그녀의 도착점은 결국 마약일 뿐이다. <세기말>에서 소령이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원인’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빈민의 자식으로 태어난 운명일 뿐, 그녀의 어떤 행동도 그녀의 몰락의 직접적 원인이 될 수 없다. 원인을 찾아야 한다면 오로지 ‘자본주의’뿐이다.
<세기말>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잘 안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 두섭은 쓰고 싶은 스릴러 대신 영화사에서 요구하는 멜로 영화 시나리오를 쓰려고 고심한다. 우연히 길을 걷던 두섭은 요요를 파는 남자를 만난다. 소령은 클럽에서 알게 된 유학생 남자와 섹스를 한다. 그는 소령이 원조교제를 하는 졸부의 아들이다. 소령과 함께 가던 졸부 아들의 차는 요요 남자의 물건을 부수게 된다. 요요 남자는 욕을 하는 그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시간강사 상우는 교수 임용을 위해 4천만원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전 애인이 그의 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게 된다. 간통죄로 경찰에 압송되던 상우는 요요 남자를 만나게 된다.
이 세 개의 이야기와 에필로그만으로 ‘세기말’의 그래피티를 완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송능한은 근원까지 파고들어가는 감독이 아니다. 표면장력을 이용하듯 <넘버3>에서도 우리 사회의 갖가지 모순과 치부를 경쾌하게 미끄러져 갔을 뿐이다. <세기말>에서 거대한 ‘벽화’를 그리고 싶었다는 말처럼, 송능한은 존재하는 양상 그대로를 그려낸다. 지나친 ‘조작’(manipulation)으로 느껴질 만큼, 캐릭터들의 우연과 필연을 치밀하게 엮어놓는다. 그들은 서로를 보고 느끼고 때로는 개입하며 각자의 삶의 방향마저 틀어놓는다. 요요 남자의 살인이 방송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두섭은 훗날 시나리오를 그만두고 만화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요요 남자의 살인을 직접 목격한 소령은 더욱 더 섹스와 마약의 ‘환상’에 빠져든다.
<넘버3>에 비해 <세기말>의 풍경은 지나치게 넓고 방대하다. 성긴 것은 어쩔 수 없다. 애초 송능한의 구상처럼 7명 정도의 캐릭터가 좌충우돌했다면 빈 곳을 채우기가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3시간은 넘게 필요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기말>이 당대의 풍경을 허술하게 그려냈다는 비판은 통하지 않는다. <세기말>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은 집으로 돌아가는 소령의 모습이다. 부감으로 멀리서 잡은 화면에는 폐허처럼 변해버린 빈민가가 있다. 재개발을 앞두고 몇 채의 집만 남아있는 산 중턱을 소령이 걸어 올라간다. 그녀는 폐허 속에서 살아가고, 화려하고 번들거리는 모텔과 클럽에서 누군가의 ‘환상’을 채워주며 돈을 받는다. 그녀도 기꺼이 환상에 동참하며 폐허의 현실에서 도피한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폐허 속으로 힘들게 걸어 올라가야만 한다.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세기말>은 모든 것을 말해준다.
1990년대는 새로운 시대였다. 오렌지족이 등장하고, 사회보다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소설들이 많아지고, 개인의 자유와 욕망이 중요한 가치로 인정받았다. 사회의 양극화가 심화되었고, 계급 이동의 기회는 점점 희박해졌다. 상우가 강의시간에 말하는, 이성복 시의 한 구절 ‘아버지 씹새끼 넌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의 80년대를 보내고 도래한, 미증유의 세계. <세기말>은 혼란의 1990년대를 (지나치게) 축약한 영화였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시나리오 작가 두섭,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타락을 택한 소령, 위선과 허위의식으로 가득한 상우라는 인물은 당대의 한국인을 대표하는 인물들이었다. 동시에 21세기의 전형적 인물이기도 한.
지금 <세기말>을 다시 평가한다면 ‘1999년의 풍속화’라고 말하고 싶다. 당대의 인물들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했는지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풍속화 혹은 박물지. 그것은 단지 과거의 풍경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들의 내면에 어떤 DNA가 흐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유전자 지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