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창피해
김수현, 2010
2011년의 갖가지 한국영화 베스트 명단에서 <창피해>는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나는 이 영화를 올해 들어와서 뒤늦게 보았고,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이 코너가 그 생각을 말하는데 적절한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기록이 어디엔가 하나쯤은 남아 있는 게 좋겠다는 믿음으로 쓴다.
<창피해>에 관한 훌륭한 평(<씨네21> 2011.12.29.)에서 남다은은 이 영화의 대사와 정서가 진부한 소녀 취향을 종종 드러낸다고 지적하면서도, 라스트 씬을 포함한 두 장면을 섬세하고 읽고 그 풍부한 표현력과 함의에 찬사를 보낸다. 망설이지 않고 동의할 수 있는 유일한 평이지만, 나는 그가 스치듯 말하며 지나간 대목, “서로에 대한 기억과 시선 속에 얽히며 과거와 현재, 환상과 현실, 마음과 육체를 오가는 과정에, 아니, 나와 세계, 나와 타자의 경계를 경쾌하게 무화하는 혼돈의 상태... 산만한 과잉이지만 그 과잉이 가볍게 들고 나고 엮인다”는 이 영화의 형식에 대한 언급에 얼마간의 보완을 하고 싶다.
맞는 말이다. <창피해>는 산만한 영화다. 영화가 산만해지기는 쉽다. 뜻하지 않은 실수로 산만해질 수도 있고, 아방가르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의도적으로 혼돈과 산만을 조성할 수도 있다. 말장난 같지만, 한 편의 산만한 영화가 어떻게 산만에 그치지 않고, 산(山)만해질 수 있을까. 고쳐 묻자면, 어떤 산만은 기껏해야 형식의 유희에 그치고 어떤 산만은 영화적 순간에 도달하는가. 물론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 대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편의 영화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답을 제출할 뿐이다. 2011년의 한국영화 중에서 <북촌방향>, <카페 느와르>와 함께, <창피해>가 그런 영화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다.
지우라는 이름을 가진 세 여인이 있다. 화가이자 교수인 정지우(김상현 분), 그의 모델로 발탁된 윤지우(김효진 분), 윤지우의 회상 속에서만 등장하는 연인 강지우(김꽃비 분).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후로는 배우 이름으로 배역 이름을 대신한다. 바닷가에 사진 작업을 나온 김상현 일행의 현재 시점 이야기를 축으로, 김효진의 회상과 김꽃비의 회상 속 회상, 그리고 현실과 회상 장면들 사이에 일견 무작위로 출몰하는 상상 장면들이 삽입된다.
내가 이 영화에 매혹된 첫 장면은 김상현이 김효진을 처음 소개받는 초반의 목욕탕 시퀀스이다. 김상현의 시선으로 김효진이 욕탕에 웅크린 자세로 수면 아래 잠겨 있는 모습을 보는 시점 쇼트가 등장한다. 다음 쇼트는 카메라가 욕탕 안에서 속옷만 걸친 김효진의 웅크린 몸을 찍은 아름다운 장면이다. 김상현의 시선은 물 밖에 있으므로 이 쇼트는 극중 누구의 시선에도 속하지 않는, 카메라라는 기계 장치 혹은 기억 장치 자체의 시선이다. 영화에서 수면은 종종 물 밖과 물 속의 물리적 경계에 그치지 않는 심리적 경계이며, 때론 현실과 환상의 경계, 나아가 한 소우주와 또다른 소우주의 경계가 된다. 물 밖의 카메라가 다음 쇼트에서 갑자기 물 속에 있을 때, 이것은 관음증에의 화답이 아니라, 카메라가 이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겠다는 선언과 마찬가지다.
<창피해>는 이후로 시점(視點)과 시점(時點)의 관습적 경계를 태연하게 허물며, 시선과 발화 주체 그리고 선형적 시간의 안정성을 교란한다. 예컨대, 한 회상 장면에서 김효진이 자신과 똑같은 옷을 입은 마네킹을 백화점 옥상에서 떨어트렸을 때, 그 밑의 차 안에 있던 김꽃비의 시선에 비치는 것은 마네킹이 아니라 김효진의 얼굴이다. 추락하는 마네킹을 김효진으로 보는 시선의 주체는 누구인가. 아니 어쩌면 이것은 추락을 상상하는 김효진의 시선이 김꽃비를 보는 장면일까.
여기서 시선은 극중 인물의 개별적 육체에 속한 물리적 시선이 아니며, 관객들에게만 허용된 카메라의 특권적 시선도 아니다. 이 시선의 등장은 자신이 보고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보고 듣고, 자신이 속할 수 없었던 시공간에 속하려는 불가능한 욕망이 육화한 순간이다. 그런데 이것은 누구의 욕망인가. 김효진의 욕망인가, 아니면 김꽃비의 욕망인가.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경계를 넘는 시선에서 사랑하는 이와의 끝내 좁혀지지 않는 거리, 나와 타자 사이의 심연에 대한 탄식임을 느낄 수 있다.
수갑으로 엮여진 김효진과 김꽃비의 손이 서로를 애무하는 순간은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일 것이다. 물리적 연계와 분리를 동시에 강제하는 수갑이라는 기계장치를 사이에 둔 두 연인의 손이 서로의 손을 조금씩 더듬어갈 때, 이 장면은 카메라라는 기억장치를 통해 타인의 기억에 자신의 불가능한 시선과 음성을 기입하려는 시도와 아름답고도 애처로운 대구의 운율을 빚어낸다.
완고한 경계들이 슬며시 고개를 숙이자, 그 틈을 타 음성과 시선과 육체들이 서로에게 금지된 세상을 오가며 활동하기 시작한다. 경공술과도 같은 이 활동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이 <창피해>를 특별한 영화로 만드는 자질이다. 관습에 도전한 수많은 비주류 영화들이 있었지만 <창피해>의 도전은 형식적 도발에 그치지 않고, 이 쇼트와 저 쇼트, 이 시점과 저 시점, 이 발화 주체와 저 발화주체, 이 소우주와 저 소우주가 서로 애무하면서 일종의 시적 리듬에 도달한다는 점에서 희귀한 성취다. 다른 한편으로, 영화만이 지니고 있는 고유한 매체적 자질들로 벌이는 축제와도 같다는 점에서 <창피해>는 자신만의 영화적 순간을 보유한다.
물론 이 영화의 존중할만한 점 한 가지는 현실의 혐오스럽거나 거북한 것들, 그러니까 정액과 토사물, 그리고 일상의 추태와 무력감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요소들은 영화의 균질성을 위협하며 <창피해>는 그로 인한 균열을 감수한다. <창피해>는 명실상부한 걸작은 아닐지라도, 2011년의 한국영화 중에서 가장 시네마틱한 체험을 선사한 세 편 중의 한편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