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용산
문정현, 2010
기억의 작동이란 묘한 것이다. 평소에는 잠잠히 있다 어느 한 순간 올이 나가듯 끝이 보이지 않던 저장고의 조각들이 줄을 서며 또로로 끌려 나와 주체할 수 없는 순간을 만든다. 그럴 때는 방도가 없다. 멈춰서 그것의 정체가 무엇인지 바라 봐야 한다.
<용산>은 2009년 1월 20일 새벽, 잠에서 덜 깬 우리를 넋 놓게 만들었던 용산 참사에서부터 시작한다. 감독은 철거민의 목숨을 빼앗은 불길을 보는 순간, 잊었던 아니 잊어야 했던 기억의 조각들과 대면하게 된다. 1991년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촉발된 분신정국 속에서 목격했던 대학생의 분신 현장, 기억은 거슬러 올라가 87년 6월 항장 때 감독의 윗집에 살던 이한열 열사의 죽음으로 까지 간다. 감독은 의도치 않게 한국의 현대사의 슬픈 순간에 그 현장에 있었다. 한 개인의 경험치고는 기구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한 개인만의 기억은 아니다. 그 기억은 집단의 기억이며 집단의 상처이다.
10년, 20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용산) 속에서 감독은 되새김질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기억을, 우리의 기억을 끌어 올린다. 열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울부짖으며 부르는 목소리, 무서울 정도로 화면을 꽉 채우는 열사들의 영정사진들, 고개를 돌리고 귀를 막고 싶지만 감독은 이미지 하나하나를 사운드 하나하나를 꼭꼭 담아 프레임과 시간을 채운다.
<용산>은 반성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일상의 촘촘함에 무기력해져 가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 가족과 내 이웃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감독은 무작정 용산과 지난 아픈 역사를 들이밀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혹은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을 반성하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 자신을 응시하며 고기를 저미듯 자기를 저민다. 피하고 싶고 힘껏 도망치고 싶지만 사시나무 떨리는 다리로 겨우 지탱하며 멈춰서 반성한다. 감독의 자기반성이 통렬하여 과할만도 한데 이 지점에서 오히려 관객은 위안을 얻는다. 우리의 현실, 인간이라면 당연히 느낄 수 있는 타인의 아픔에 같이 아파할 겨를이 없는 우리의 현실. 그 현실을 들여다보는 것을 피하고 피하다 상처가 터지기 직전이거나 아니면 피하고 피하다 무관심으로 스스로를 속였던 관객이라면 위안을 얻을 수 있다.
훤한 새벽에 도심 한 가운데서 사람이 타 죽어가는 현실과 누구 하나 사과하지 않는 현실에 발을 동동 구르고 헛웃음으로 애써 집단적 상처를 감춰왔던 사회에 <용산>은 위안을 준다. ‘우린 같은 시간을 겪고 있다고 그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보며 도망치지 않으면 우린 다음 문을 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용산 철거민 싸움을 같이 하는 배은심 여사(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를 통해 타인의 아픔을 외면하지 않은 사람만이 시대의 폭력 앞에서 상처 입지 않고 당당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독립다큐멘터리가 채무와 분노로 쌓여져 왔다면 <용산>은 한국독립다큐멘터리를 한동안 괴롭히던, 변하지 않는 현실에 대해 성찰하려는 여러 노력의 정점에 있다. 한국독립다큐멘터리는 깊은 반성의 문을 닫고 이제 어떤 문을 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