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
[한국영화걸작선]첫사랑
이명세, 1993
이명세의 < M >을 보는 도중에 묘한 데자뷔가 왔다. 2007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어떤 면에서 1993년작 <첫사랑>의 영화적 환기이거나, 20년을 간극으로 둔 리바이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만 생각해 보면 둘 다 첫사랑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거니와, 둘 다 이명세 감독의 가장 개인적인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르게 단언하건대 <첫사랑>은 이명세의 가장 빛나는 걸작 중 하나다.
1993년 당시 이명세는 충무로 상업영화계의 새로운 신동이었다. 데뷔작 <개그맨>은 그가 배창호의 (보다 뛰어난) 수제자라는 증거였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는 새로운 한국영화의 시대가 오고 있다는 예언 같았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아니었다면 김의석의 <결혼 이야기>(1992)를 비롯한 로맨틱 코미디의 물결은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성공을 스스로 비웃기라도 하듯 이명세는 당대의 관객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을 <첫사랑>을 만들었다. 최종 관객은 겨우 5천 명이었다.
<첫사랑>은 대학에 들어간 열아홉 살 소녀(김혜수)가 연극반 연출자(송영창)를 짝사랑하고, 몇 번의 데이트와 첫 키스를 한다는, 별것 없는 이야기다. 아니, 여기에는 사실 이야기라고 할만한 것이 없다. 이명세는 첫사랑의 기억과 감정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그려 내는 데만 집중한다. 이명세는 송영창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바람에 실려 창밖으로 흘러나가는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선풍기와 부채를 총동원했고, 60 테이크 이상을 찍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한낮에 반짝거리는 지붕을 표현하기 위해 기와를 모두 식용유로 칠했고, 목련을 모조리 따서 세트에 달았다. 그런 이명세의 방식은 서사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던 당시의 한국 영화계에서는 가히 도착적인 방식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런 방식을 통해 이명세는 <첫사랑>이 ‘첫사랑’이 아니라 첫사랑의 ‘기억’에 대한 영화라는 걸 분명하게 한다. 첫사랑은, 그것이 누구의 첫사랑이든 관계없이, 한 인간의 인생에서 가장 짜릿하면서도 슬픈 기억이다. 그것은 중년이 된 어느 날 신발 끈을 묶다가, 혹은 평소처럼 버스를 타고 광화문을 지나가다, 불현듯 찾아와서 심장을 두들긴다. 이명세는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첫사랑의 순간들을 마치 세밀화를 그리듯이 재현하고, 중요한 것은 이야기가 아니라 첫사랑에 빠졌던 순간의 풍광과 기억이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나는 김혜수가 자전거를 타고 벚꽃이 날리는 거리를 내달리다가 송영창의 창가로 부유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순간 여전히 뭔가 끓어오르는 감흥을 느낀다. 그것은 스타일과 이야기가 완벽하게 합일된, 혹은 오로지 스타일로서 온전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마술 같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이명세가 ‘스타일리스트’라는 이름을 얻게 된 첫 번째 영화였고, 이명세는 같은 접근법으로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만들며 상업적인 감각과 자신의 스타일을 버무리는 데 (처음으로) 성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가 자아내는 마법 같은 순간은 <형사>와 < M >에서 다시 재현되지 않았다. 이명세의 영화에 대한 접근법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우겨보자면, 나는 이명세 영화의 즐거움이 CG의 발전과 함께 사그라졌다고 믿는다. 여기서 내놓고 싶은 또 다른 이름은 팀 버튼이다. 팀 버튼의 몰락은 사실상 CG 발전과 함께 이루어졌다. 그의 영화는 수공예로 정성스럽게 창조한 아날로그 특수효과의 지장 속에 있었다. <비틀 주스>나 <배트맨> 시리즈, <가위손>과 그 이후의 영화들을 한번 비교해 보시라. 그가 자신의 수공예적 상상력을 번들거리는 CG로 재창조하는 순간 물리적인 아름다움은 처절하게 거세된다. 이명세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의 초기작들이 주는 감흥은 ‘손맛의 상상력’이라고 믿는다. 혹은 ‘손맛의 공간감’이라고 믿는다. 아날로그 방식으로 창조한 <지독한 사랑>의 세트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 꿈처럼 가짜 같은 바닷가의 집은 CG로 재창조하는 순간 꿈이 아니라 그냥 가짜가 될 것이다. 손맛을 흉내 낸 CG 이미지가 그걸 대체하는 순간, 이명세의 스타일은 묘하게 숨이 죽어 버리는 것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명세의 최고작을 꼽으며 <첫사랑>, <지독한 사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사이에서 망설일 테지만, 손맛의 스타일리스트로서 이명세의 가장 순수한 절정이 <첫사랑>이었다는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한마디 붙이자면, 이명세 감독의 초기작들은 <개그맨>을 제외하면 DVD로 좀처럼 발매되지 않고 있다. 이건 거의 문화재 관리 직무 유기에 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