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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걸작선]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

[한국영화걸작선]고양이를 부탁해 대표 이미지

청춘 성장기 영화로 스스로를 호명하는 작품들에 그다지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그 시절, 아니 그 세대에 대한 향수가 조금도 없다는 개인적 이유도 무시하지 못하겠지만, 특정 세대를 특정한 유형 안에 박제시키고 그들이 특정한 고민을 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영화들의 무신경이 마땅치 않다. 한 때는 청춘을 통과한 어른 감독이 그 시절을 무책임하고 게으르게 기억하는 탓이라고 여겼으나, 이십대 초반의 감독들이 고등학교 시절이나 현재의 자화상을 영화화하는 방식 역시 유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다음부터는 감독의 나이가 문제의 본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춘영화들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관계들이나 그들이 사로잡힌 고민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밝음과 어둠에조차 (당시의 나를 떠올리면) 설득되지 않는 순간들이 훨씬 많다. 딱히 특이한 성장기를 보낸 것도 아닌데, 이런 반감은 혹시 그 때를 망각해버리고 싶은 무의식의 반응일까, 무조건적인 낭만적 회고만큼 나쁜 냉소일까,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현재 진행형이었던 그 시간을 마치 지금의 나와는 다른 종자를 바라보듯 거리를 두고서 감정을 조절하는 일이 오만하게 느껴지는 걸까. 많은 생각을 해 보았으나,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물음을 갖고 그런 영화들을 마주한다. 

그런 내게도 극장 불이 켜진 후, 자리에 남아 펑펑 울게 만들었던 청춘영화에 대한 기억이 있다. 2001년, <고양이를 부탁해>를 봤을 때다. 어떤 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당시 자신이 놓였던 상황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남는 경우가 있는데, 내겐 <고양이를 부탁해>가 그러하다. 그날 이후 영화를 다시 본 적이 없고, 지금의 내가 그때와 같은 감흥을 느낄지조차 장담할 수 없지만, 아주 가끔씩 <고양이를 부탁해>의 어떤 풍경들이 떠오르곤 하니, 이 자리에서 잠시 기억해도 될 것 같다.

그 기억은 태희(배두나)와 지영(옥지영)에게 머무른다. 한 장면이 있다. 지영을 만나러 다 쓰러져가는 지영의 집을 찾은 태희는 지영의 할머니가 거듭 권하는 커다란 만두를 거절하지 못하고 양볼 가득 구겨 넣고 씹는다. 친구가 있었으면 절대 공개하지 않았을 더없이 초라한 집에서 할머니의 환대를 거부하지 못하는 낯설고 불편한 상황이 태희의 모습에 가득 담기는데, 그 모습은 친구 지영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이자, 동정과는 결이 다른 아픔처럼 보였다. 얼마 뒤, 지영의 집이 무너져서 유일한 가족들마저 죽자, 지영은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닫고 태희는 자신의 집을 박차고 나가 혼자 남은 지영의 곁에서 다른 세계를 꿈꿔보기로 한다. 요란하지 않으나 용감하고 당당하며 온기가 있는 태희의 결심과 행동은 감상적인 연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현실을 탈출해서 지켜낸 우정의 연대. 끝까지 둘의 심리적 관계는 평등했다. 세상에 관계는 연애밖에 없다고 믿었던 그 때의 내가 모르는 관계의 감정이었다. 태희, 지영과 나는 비슷한 또래였다. 하지만 이 영화가 슬펐던 건 또래집단에 대한 공감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던 것 같다. 나는 사회적 조건으로는 그들보다 신분이 편안한 대학생이었으나 그들이 끌어안은 감정을 가지지 못했다. <고양이를 부탁해>는 그 감정에 대한 자괴감과 동경 때문에 마음이 무너지던 영화, 그러니까 나의 기억이 아니라 나의 환상을 건드렸던 영화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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