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편지
장형윤, 2003
부족함이 여백을 만들어 내는 애니메이션 영화..<편지>
애니메이션을 전공하고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어 온 필자는 한때 비쥬얼이 어설프면 내용 불문하고 그 작품은 재미없는 애니메이션 영화로 구분 했었다. 필자의 이런 잘못된 습관에 뒤통수를 친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었으니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하고픈 장형윤 감독의 단편애니메이션 <편지>다.
필자와 같은 부류에게 문화적 충격을 줄 요량으로 어설픈 그림을 의도적으로 구사한 거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신선한 충격임은 분명했다. 다수의 영화제와 매체를 통해서 이미 많이 알려진 <편지>는 ‘나’라는 주인공 남자의 실연을 기반하고 있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시대적 상황과는 달리 아날로그 방식인 편지로 헤어진 연인에게 계속 말을 걸지만 ‘나’는 그녀로부터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큰 공룡의 굽어진 등을 힘겹게 타고 넘어가 매일 우체국에 들러 그녀에게 편지를 부친다. <편지>에서는 이런 실연당한 ‘나’의 사실적 감정 묘사 위에 무척이나 귀여운 공룡들이 등장 하는데 사랑스런 모양새와는 달리 하는 짓은 사람들의 소통을 방해하는 얄미운 행동을 하고 있다. 필자 또한 헤어진 연인에게 수없이 연락을 취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꾸에 울화가 치밀었을 때가 있었는데 그때 본 이 공룡들은 필자에겐 괴물로 보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괴로운 이별의 시간이 지나간 후 다시 만난 이 공룡들은 어느새 필자의 슬픔을 보듬고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편지> 이후부터 장형윤 감독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동물들은 인간관계에서의 갈등과 슬픔을 유희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게 되고, 이는 장형윤 감독 작품에 큰 미덕으로 자리 잡게 된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나’는 대답 없는 그녀를 그리워한 덕분에 매일 우체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그런 ‘나’를 기다리고 지켜보고 있는 우체국 직원인 ‘아미’가 있다.‘아미’는 왕가위 감독 영화 <중경삼림>에서 ‘경찰663’을 바라보는 ‘페이’처럼 헤어진 그녀를 잊지 못하는 ‘나’를 슬픔으로 매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나’를 향한 ‘아미’의 감정은 이야기 마지막 부분에 와서 확연히 드러난다. <중경삼림>에서 ‘페이’의 감정을 오랜 러닝타임동안 보여주는 방면, 고작 몇 분 동안 보여주는 ‘아미’의 감정에 우리의 마음이 동요되는 건 부족한 그림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나’의 감정은 계속된 ‘나’의 나레이션을 통해 전달 받을 수 있지만 ‘아미’는 대사 한마디 없다.
<편지>의 조형적 특징은 단순한 선와 단색으로 이뤄진 카툰 형식인데 만약 여백 없이 그림에 디테일로 꽉꽉 채워진 아트?이었다면 이야기 진행과정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아미’의 감정을 관객은 스스로 채워나갈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나’의 편지를 찢어 삼켜버린 후 울어 버린 ‘아미’의 감정이 전혀 생뚱맞지 않은 건 영화 내내 관객이 채워나갈 수 있는 여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상업애니메이션에서 기대하는 관객의 욕망은 오락이다. 관객은 애써 여백을 스스로 채워나가려 하는 것을 꺼려한다. 하지만 그 여백을 조금만 주시한다면 10분이라는 시간동안에도 큰 감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편지>는 보여주고 있다. 장형윤표 애니메이션의 시작을 알리게 된 <편지>는 현재 장편애니메이션을 제작 하고 있는 장형윤 감독에게도, 그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관객들에게도 재발견의 의미가 있는 좋은 애니메이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