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오일리 부기
구스타보 코바, 2009
당신이 삼십대 미만의 나이로 십년 내에 자신이 연출한 장편애니메이션을 극장에 상영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지금 <오일리 부기 Boogie, el aceitoso>를 주목해보시기 바란다. 얼마전 진행된 한국영화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연출전공 마스터클래스의 첫 날, <오일리 부기>의 구스타보 코바 감독은 영화를 한다는 사람이 십분 안에 돈 얘기를 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라는 말이 있다며 자신의 영화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나도 학생들이 단골안주로 씹는 작품제작의 삼대 악조건을 들먹이며 이 작품을 소개하려고 한다.
저예산, 인력부족, 살인적인 단기제작기간
이 악명높은 영화 제작의 삼대 악조건을 고스란히 공유하고 만들어진 <오일리 부기>는 영화아카데미에서 제작하는 장편 애니메이션의 5배에 불과한 예산으로 탄생한 상업영화이다. 어느 영화인들 안 그러냐고 하겠지만, 아르헨티나는 한국에서는 요즘 흔하디 흔한 애니메이션 전공교육을 하는 학교 하나가 없는 나라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의 전통이 없지는 않으나 영화제작사들이 줄어들어 손가락 수 안에 숫자를 셀 정도여서 미국국적의 영화들 배급으로 다 장악된 상태라 아르헨티나의 일루젼 스튜디오가 첫 장편애니메이션을 시도하여 자국에서 모두 만드는 시도를 한다는 것 그 자체는 매우 도전적인 과제였다.
아르헨티나 일간지에 70년대 초부터 최근까지 연재된 국민만화가 폰타나로사의 흑백 컷만화의 주인공 부기는 장편영화로 부활되기 위해 시나리오부터 이미지 디자인까지 꼬바감독의 성장시절 내내 함께한 부기만화에 대한 애정을 듬뿍 받고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애니메이션의 세계로 이주를 했다.
기법은 시간과 예산의 경제적인 이유로 컷아웃 방식을 80%정도 선택하였고 나머지는 드로잉애니메이션도 섞여있다. 소품이나 배경디자인에는 실사적인 3D 입체이미지와 사진이미지 등을 드로잉과 함께 꼴라쥬하기도 하였다. 애니메이팅은 전통적인 셀 애니메이션 방식에 익숙한 노련한, 하지만 디지털 방식에는 약한 60대의 애니메이터들과 3D 제작과 디지털 소프트웨어에 익숙한 젊은 인력의 능력을 조화시켜가며 15명의 애니메이터가 프러덕션과 포스트를 넘나들며 작업을 하였다. 또한 프러덕션 기간 7개월 중 2개월은 툰붐을 배우느라 시간을 보내어야 했으며 일 년 안에 제작이 끝나야만 했다. 제작의 시기 시기마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최선의 선택으로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들이 조화롭게 결합하도록 해야만 했던 꼬바 감독이 그 선택들이 스토리텔링에 필요한 최상의 조건으로 녹아들도록 끊임없이 판단의 칼날을 벼려내는 과정을 듣자니 서부의 무법자처럼 총으로 사람들을 쓰러뜨려나가는 주인공 부기에 못지않게 흥미진진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제작되고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을 생각하면 두 가지 측면에서의 비유를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장인정신이 깃든 예술성과 영화로서의 스토리텔링의 조화. 다른 하나는 그것이 세상에 나가 관객과 만나기까지의 제작과정.
전자를 얇디 얇은 습자지 종이로 한 송이 장미꽃을 피워내는 것이라 한다면 후자는 피자를 굽는 것이라고 비유해보고 싶다. 가느다란 줄기에 섬세한 꽃잎을 한 장 한 장 조심스레 붙여가며 한 송이 꽃을 완성하는 과정과 피자를 굽는 과정은 매우 촉각적으로 또는 후각적으로 틀리다. 피자를 굽는 일은 끊임없는 선택을 해나가는 과정이다. 도우의 종류를 선택하고, 치즈와 토핑을 선택하고 반죽부터 토핑되는 레이어의 순서와 베이킹의 시간, 배달되는 시간, 서빙되는 조각의 수 등등. 수많은 경우의 수 사이에서 살풀이춤을 춰야만 한다.
죽일 것인가, 살릴 것인가...
살인청부업자에게 완벽하고 편안하게 준비된 작업현장이 없듯이 지독한 성차별주의자이자 애국주의자 주인공 부기는 돌발상황과 현실의 평범한 악조건들 속에서도 살인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담담하게 지켜나간다. 스스로를 죽음의 칼날에 노출시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우 폭력적인 킬러지만 부패한 현실과 성에 대한 유머를 군더더기 없이 더해가면서.
잔인함이나 두려움이 아닌 폭력 그 자체를 관조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실사가 아닌 애니메이션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한 꼬바감독은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넘나들며 상상이 이끄는 모든 시도에 어떤 경계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 듯하다.
<오일리 부기>가 내 피부에 와 닿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장미꽃 한 송이를 피자 한 판처럼 완벽하게 구울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수많은 젊은 감독들이라면 자신을 부기에게 또는 꼬바 감독에게 비추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이다. 이제 막 킬러로서 자신의 업을 선택하려는 젊은 연출자들이여! 이 거울을 보고 자신이 킬러로서의 서열이 어떠한지 또한 적성이 맞는지 한 번 매겨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