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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이스]여행

배창호, 2009

[초이스]여행 대표 이미지

부끄럽지만 나는 영화 팬임을 자처함에도 배창호 감독의 영화를 단 한 편도 본 적이 없다. 90년대에 청소년기를 지내온 나는 때마침 불어닥친 직배 폭풍과 맞물린 한국 영화의 쇠퇴기를 지나며 막연히 국산 영화는 한 수 아래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가리가 여물 무렵에는 ‘영화사’라는, 입문자가 거치는 수순과, 시대의 흐름이 만들어낸 키치의 바람을 타고 아트 영화와 B 무비를 오가는 영화에 대한 변태적 애정행위를 계속 했었다. ‘기형적 씨네필’ 그게 내 이름이었다. 

배창호 감독의 <여행>을 보고 싶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올 해 전주 영화제가 진짜 재미없었는데, <여행>이 그나마 전주여행을 구원해 주었다.”는 누군가의 말 때문이었다. 그저 옛날에 날리던 감독으로만 생각했던 배창호 감독의, 심지어 독립 영화가 그렇게 재미있다니 궁금해졌다. <여행>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누군가의 여행을 구원했다는 사실도 흥미로웠다. 

아리랑TV에서 기획하여 제작하는 <한국, 영화를 만나다> 시리즈의 제주편에 해당하는 <여행>은 제주도라는 섬을 배경으로 세 편의 단편영화를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서로 사랑하지만 쉽게 말하지 못하는 어린 커플과, 제주도라는 섬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던 한 여자의 중학생 딸, 아내 혹은 어머니의 삶에서 문득 도망치듯 제주도로 향한 중년 여인이 각 에피소드들의 주인공들이다. 이들에겐 대단한 일은 생기지 않는다. 드라마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를 제외하고는 카메라는 시치미를 뚝 떼고 그들의 뒤를 쫓는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영화는 지루하지 않다. 분명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여러 영화를 통해 많이 봤다고 여겼던 이야기들인데, 어느 순간 반짝하고 빛나는 기운까지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나는 이 영화가 재미있었던 것일까?

그 대답은 영화가 끝나고 있었던 대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배창호 감독은 영화는 없는 자극을 만들어 관객을 흔드는 것이 아닌, 흔한 현실을 카메라라는 채로 거르고 걸러 그 안에서 금을 찾아내는 작업이라고 자신의 영화관을 설명했다. 나는 무엇을 본 것이 아니라, 반응 했던 것이다. 그들의 모습 속에서, 결국 비집고 나오는 삶의 어떤 순간. 서로 떠나야 할 사정의 커플이 가지 말라는 말은 못하고 가위 바위 보로 결정을 하기로 할 때, 10년 가까이 헤어졌던 모녀가 마주 앉아 미안함과 서운함이 교차하지만 결국 휘리릭 휘리릭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장난 같은 주문 안에서 결국 어쩔 수 없음을 확인할 때, 세월에 쓸려 어느 덧 잊었던 시절이 ‘긴머리 소녀’를 부르는 중년의 그녀에게 다시 찾아올 때. 배창호 감독이 카메라로 건져낸 이 순간들은 관객에게 아무런 요구나 설명도 하지 않고 조용히 빛난다. <여행>은 배창호라는 이름이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조용하고 묵직하게 계속 전진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지만 소중한 영화다. 대단하거나 꼭 봐야할 영화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만약 당신이 이 영화를 우연히 만난다면 분명히 그것은 행운일 것이다. 내게도 그랬으니까. 앞으로는 예전의 우리 영화를 많이 찾아보게 될 것 같다. <꼬방동네 사람들>부터 시작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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