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경주여행
김지현, 2010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설레임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특히 혼자 하는 여행은 누군가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부풀게 한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실망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신 여행은 항상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전해준다.
효재(이우정)는 기차에서 근사한 남자를 만났다는 친구의 말에 기대를 품고 기차에 몸을 싣고 경주로 떠난다. 효재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뀐다. 옆자리엔 술취한 아저씨가 주정을 부리고 뒷자리엔 꼬마가 앉아서 의자를 발로 찬다. 효재는 그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화를 내고 만다. 경주에서 미술관으로 가는 버스에서 만난 친절하고 근사한 외국인 남자와 대화가 잘 풀린다. 하지만 외국인 남자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인사를 건네고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미술관 문은 닫혀있다. `누군가`를 만나지도 못하고, 전시를 보지도 못한 효재는 혼자 경주여행을 하게 된다. 그녀의 의도한 여행은 의도대로 되지 않고 혼자 거리를 걷고 혼자 심심하게 밥을 먹게 된다. 여행지는 손님에게 친절한 듯 하지만, 담배를 피우는 여자에게 돌연 태도를 바꾸기도 한다.
효재는 여행을 마치고 막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만 버스를 놓친다. 그러자 낚시를 하던 남자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그녀를 경주역까지 데려다주려 한다. 효재 역시 남자의 관심이 싫지 않다. 그런데 남자는 친절하게도 효재를 `놓친 버스`까지만 태워다준다. 남자의 애매모호한 친절에도 불구하고 효재는 기차를 놓치고 만다. 다시 외롭게 혼자남은 효재는 남자가 가르쳐 준대로 경주의 커다란 무덤에서 미끄럼을 타며 전에 없는 즐거움을 만끽한다.
김지현 감독의 <경주여행>은 기대가 어긋난 한 여자의 여행기를 보여준다. 전시에 갈 요량으로 경주를 찾지만, 더 중요한 목적은 다른데 있는 듯 보인다. 혹시 근사한 남자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가 쉽사리 이루어질리 없다. 영화는 그런 뻔한 주인공의 기대감을 뻔하게 배반하면서도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는다. 예전에 와봤을지 모르는 어떤 곳에 대한 반가움. 혼자 여행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관광지 사람들의 시선. 친절을 베푸는 듯 하지만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경우. 그리고 결국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다시 혼자 남게 되는 상황들.
경주로의 기차 여행을 보여주는 이 작품을 보면, 홍상수 감독의 <생활의 발견>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가 엎어지고 여행을 떠난 경수(김상경)는 경주로 가는 기차에서 예전에 알던 여자(추상미)를 만난다. 이런 필연적 우연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생활의 발견>의 여행은 우연한 만남과 이어지는 관계 그리고 헤어짐으로 계속 상승작용을 일으키고, 만남과 관계들은 영화 속에서 내적인 댓구를 이룬다. (물론 단편이기는 하지만) <경주여행>에서는 기대했던 사건조차 일어나지 않는다. 주인공의 기대를 배반함으로써 짧은 순간에도 계속 새로운 국면이 펼치지게 이끌어간다. 어떤 관객은 <비포 선 라이즈>의 달콤한 하룻밤 로맨스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출발점에서부터 기대를 이루지 못하는 여자의 여행을 보여주면서, 그안에서 벌어지는 상황들과 주인공의 심리를 통해 영화적 긴장과 재미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시종일관 여행자인 효재의 입장에서 사건을 이끌어간다. 여행자가 아니라, 여행자를 맞이하거나 기다리는 입장이라면 어떨까? 이말은 여자의 입장이 아니라, 남자의 입장이면 어떨까라는 의문가 비슷할 수 있다. 효재에게 관심을 보인 남자는 효재가 원하는 어떤 순간 직전에서 멈춘다. 그 남자는 왜 그랬을까? 관광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외지에서 온 낯선 손님에게 관심이 있을 것 같은데, 그 남자는 너무 맥없이 효재를 놓아주고 만다. 심지어 남자는 효재를 기다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자신의 일정을 바꾸고 기차 시간을 알아봐가면서 같이 밥이라도 먹을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남자는 왜 효재를 역까지 데려다주지 않고 굳이 버스를 태워보내야 했을까? 갑자기 다른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남자의 입장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감독은 효재의 기대를 배반함과 동시에 남성 관객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다른 전개를 이어간다. 효재는 어쨌든 집에 가지 못하고, 뜻하지 않게 무덤에서 미끄럼을 타게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 작은 즐거움이 근사한 `누군가`를 만나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일까?
김지현 감독은 원하는 상황과 그것과 무관하게 주어진 상황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주어진 상황을 스스로 마주해야 하는 한 사람의 심리를 포착해낸다. 김지현 감독은 그런 상황에 놓인 인물의 심리를 표현하는데 특별한 재능이 있어 보인다.
<경주여행>을 보고 문득 경주로 여행을 떠나, 기차에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커다란 무덤에서 미끄럼을 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런 계획이 원하는대로 이루어질지는 미지수일터이다. 효재 역에는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의 이우정 감독이 출연해, 의외의 연기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