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과거는 낯선 나라다
김응수, 2007
1986년 4월 28일 신림 사거리. 전방입소 반대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 김세진, 이재호가 분신자살을 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흐른 뒤, 김응수 감독은 그 날의 기억을 불러온다. 아니, ‘기억을 불러온다’는 게 맞는 표현일까? 일반적인 다큐멘터리들이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방식을 이 영화는 따르지 않는다. 사건 자체에 대해서, 이를테면 그 날 사건을 직접 겪거나 본 사람들의 증언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며, 그 사건의 역사적 맥락이나 정치적 파장 같은 것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 사건 앞에 너무 늦게, 혹은 너무 빨리 도착한 자들, 그러니까 죽음을 목격하지 못한 채, 죽은 자들의 잔상, 흔적만을 안고 살아남은 자들의 사적이고 파편화된 이야기를 듣는다. 어쩌면, 듣는다기보다는, 그들의 조각난 기억들을 끈질기게 끄집어낸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를 보는 동안, 과거가 현재로 호출되는 건지, 현재가 과거로 호출되는 건지, 이 영화가 어느 시간 속을 부유하고 있는 건지 알기 어렵고, 그 모호한 상태에 이 영화의 슬픔이 고인다.
여기에는 질문을 하는 감독과 당시의 기억을 답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보면,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관계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되는데, 그건 그 관계가 영화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 우리가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보아온 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경우, 인터뷰어(대체로 감독)가 인터뷰이와 한 프레임 안에 존재하는 적은 드물어도, 우리는 그들이 그 순간 같은 시공간 안에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묻는 자와 답하는 자 사이에는 시공간적 단절이 있는 것처럼 들리고, 보인다. 요컨대, 답하는 자들은 현실계에 존재하는데, 묻는 자는 어딘지 초월적인 시공간에서 질문하는 것 같다. 혹은 인터뷰이의 떨리는 목소리는 구체적인 인물의 것인데, 인터뷰어의 목소리는 그 실체를 알 수 없고, 때로는 기계적이고 추상적이다. 질문자의 목소리는 마치 확성기에 대고 말하듯 울려 퍼지며, 시종일관 취조의 말투를 취한다. 물론 김응수 감독은 이게 어떤 의도라기보다는 마이크가 하나뿐이어서 질문자와 답변자의 목소리를 동시에 녹음할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인터뷰가 끝난 뒤, 나중에 그 장소에 다시 가서 자신의 목소리만 따로 녹음을 하고 편집 때 에코를 붙인 거라고 밝혔다. 그러나 그 효과가 불러오는 영화적 파장은 강렬하고 인상적이다. 마치 한국 근현대사를 떠도는, 애도되지 못하고, 애도될 수 없는 유령 같은 실재가 현실 세계에 침입해서 현재가 찢겨지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제목은 이미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과거가 낯선 이유는 그것이 망각되어 사라지거나, 현재로 돌아와 현실의 질서와 언어 안으로 통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가 낯선 이유는 그것이 괴이한 목소리로, 기운으로 해결되지 못한 채, 끊임없이 현실로 돌아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신화가 되기를 거부하는, 여전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과거 앞에서, 그렇다면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조각난 과거를 하나씩 주워 모으며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흔들리는 인물들, 철저한 질문자의 위치에서 기어이 카메라 앞으로 나와 고백하던 감독을 보는 동안, 결국 우리는 그 질문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