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살 중의 살
이원우, 2010
나는 내 몸 안에 거하고, 몸으로 세계와 접한다. 나의 바깥은 내 몸이다. 몸으로 나는 타자를 만나고 만질 수 있다. 내 자아는 내 몸을 입고 있지만, 그 점유의 증거가 비로소 나다. 나는 곧 내 몸이며 나는 내 몸을 산다. 몸은 살과 뼈로 이루어진다. 성서의 창세기에서, 자신의 갈빗대를 취해 야훼가 창조한 인류 최초의 여성을 일컬어 아담은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했다. 생존의 토대를 이루는 것이 뼈라면, 관능과 쾌락은 살에서 기원할 터이다.
2010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2011 등에서 상영된 이원우의 <살 중의 살>은, “여성으로서” 감독이 겪은 “몸의 기억과 경험”을 표현하려는 작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의도로 제작된 영화에서 정작 그녀의 몸은 보이지 않는다. 관객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여성 속옷의 일부분으로 짐작되는 레이스와 망사 조각의 연속, 뼈를 보여주는 엑스레이 사진, 필름 퍼포레이션 등속이며, 들을 수 있는 것은 (남성으로 짐작되는) 누군가가 카메라 곁에서 잠자며 내쉬는 숨소리와 코 고는 소리 뿐이다. 인화된 빛과 녹음된 소리로 흔적만 남은 여성의 몸과 남성의 존재. 이를 담은 필름은 마치 죽은 예수의 형상이 나타나는 베로니카의 베일처럼, 관객에게 그들의 부재하는 현전을 전한다.
흔히 서구 이미지 재현의 역사에서 사라진 몸은 누군가의 죽음, 혹은 누군가를 죽인 사건, 또는 그로 말미암은 자아를 향한 증오를 형상화한다. 아우슈비츠나 보스니아 내전 등 20세기를 관통한 대량 학살 이후, 서구를 삼켜버린 죄책감을 드러내는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불행을 나타내는 의식을 통해 자신을 비하하기.
그러나 사라짐의 미학과 정치학이 언제나 염세적인 것만은 아니다. 때로 사라짐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 넘쳐났던 형상의 넘침에 대한 새로운 답이다. 지나친 드러냄은 보이는 것 말고는 다른 것을 보여주지 못하고, 형상의 힘을 약화시킨다. 이를 깨닫고 홀딱 다 벗은 나체마저 넘치는 재현이라며 범속하게만 여기는 작금의 예술가들은, 인간의 몸을 사라지게 하여 비로소 자아와 타자를 향한 애증과 죄책감을 드러내고 트라우마와 유령들을 불러들여 푸닥거리한 뒤, 삶의 관능과 열광을 노래할 수 있었다.
<살 중의 살> 속 몸이 실종된 속내도 비슷한 맥락으로 읽을 수 있겠다. 뼈와 옷 사이에서 당연히 현전해야 할 살아있는 여성의 몸을 복제된 재현 속에서 사라지게 하자 새로운 효과가 태어난다. 몸이 지닌 관능과 그에 대한 열광은, 지직거리고 끼익거리는 소리들, 플리커의 강도와 함께 점점 강렬해져간다. 몸을 감춤으로서 되려 몸을 드러내고 그 권능을 일깨우는 역설의 과정은 삶의 의지를 충만케 한다. 오랜만에 보는 35mm 핸드메이드 필름의 손맛도 썩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