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수박병아리
원종식, 2007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고, 애써 말로 표현해놓으면 휙- 날아가 버리는 감정이 있다.
영화의 어떤 장면, 삶의 어떤 순간.. 잡으려면 날아가고, 잡아놓으면 변해버리는.
좀 더 애써 표현하자면 ‘그.. 그.. 그 무언가’ 정도로 밖에 표현되지 않는 감정.
4년 전, <수박 병아리>를 본 뒤의 느낌이 그랬던 것 같다.
영화가 시작하면 한 무리의 기괴한 병아리 떼들이 등장한다. 머리는 크고 울퉁불퉁하며, 날개는 그 흔적만 보일 정도로 작고, 눈은 쾡하다. 게다가 자신의 몸보다 대여섯 배나 큰 수박을 한 입에 삼켜버리는 무모한 식성도 가지고 있다. 귀여움과 연약함의 상징인 병아리가 처음부터 기괴하게 등장하며 눈길을 사로잡는 이 영화는 8분이라는 짧은 길이를 가진 원종식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짧은 단편이지만 이 영화 속에는 대하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방대한 스토리와 마음을 뭉클하게 건드리는 독특한 여운이 담겨 있다.
어느 여름 한 무리의 ‘수박 병아리’들이 나타나 밭의 수박들을 모조리 삼켜먹는다.
그 광경에 충격을 받은 할아버지는 초고층 원두막에서 추락하여 돌아가시고, 슬픔에 찬 손자는 할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금은 닭이 된 병아리 떼를 찾아낸 소년. 자신이 오랜 시간 훈련시켜 데려온 ‘달걀 먹는 실뱀’들에게 닭의 알들을 모조리 먹어치우라 명령한다. 닭들에게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선사하려는 계획이었지만 닭들은 눈만 꿈뻑거릴 뿐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달걀을 삼켜 몸이 동그래진 녹색 실뱀들을 보고는 ‘수박’이라 좋아하며 먹어치워 버린다. “이런 닭대가리들!” 분노에 찬 소년이 닭의 창자를 뽑아 하늘로 던져버리고, 하늘 높이 솟은 빨간 창자는 커다란 보름달을 휘감는다. 빨간 (창자) 줄무늬가 생긴 보름달을 본 닭들은 ‘커다란 수박’이 나타났다며 모두 하늘 위로 날아가 버린다. 홀로 남겨진 소년은 허망한 얼굴을 한 채 엉엉 울음을 터뜨린다.
시시콜콜하게 줄거리를 써놓고 보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수박 병아리>의 매력이다. 거침없이 비약하고, 예상을 뛰어넘고, 이리저리 툭툭 튀다가 끝내는 마음 한 켠을 싸하게 만든다. 복수를 결심한 뒤 중년남성의 목소리로 변했던 소년의 음성은 영화의 마지막, 복수의 대상이었던 ‘수박 닭’들이 모두 떠나가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아이의 목소리로 되돌아온다. 평생 맹목적으로 좇아왔던 복수라는 생의 목표가 결국 아무 것도 아니었음을 느끼게 된 소년이 터뜨린 가장 ‘아이다운 울음소리’.
그 길고 긴 아이의 울음소리가 결국엔 마음을 뭉클하게 만들어 버렸다. 어떤 관념과 목적에 휘둘려 ‘내’가 ‘나’이지 않았던 시간들. 그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허망함. 소년은 결국
아이다운 울음을 터뜨리지만 자신이 왜 울고 있는지, 자신을 울게 만든 게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마냥 펑펑 운다. 원종식 감독의 아내이자 애니메이션 감독이기도 한 한병아 감독이 연기한 소년의 울음소리는 그 어떤 유명 배우의 눈물 연기보다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 짧은 영화를 본지 4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가끔 꺼내보며 혼자 낄낄 거리다, 우울해지다,
위안을 받는 기분이 드는 건 아이의 울음소리에 담긴, 아직도 정확히 만져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그.. 그.. 그 무언가’ 때문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