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일루셔니스트
실방 쇼메, 2010
1998년 <노부인과 비둘기>라는 작품을 선보이며 프랑스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과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단편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면서 주목을 받게 된 프랑스를 대표하는 실뱅 쇼메 감독은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 희생과 사랑, 유대감이란 주된 테마를 가지고 수작업이 보여주는 섬세한 캐릭터의 움직임과 생략, 절제미가 돋보이는 작품 세계를 추구하는 작가주의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감독 중 한사람이다.
감독의 본격적인 애니메이션 경력은 1988년 영국 런던의 한 스튜디오에서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로 일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2003년 첫 장편 <벨빌의 세 쌍둥이>로 역시 아카데미 애니메이션 장편 부분에 노미네이트되면서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전 세계 애니메이션 팬들에게 각인 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꼭 7년 만인 지난2010년에 두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일루셔니스트>를 세상에 내놨다. 반갑게도 국내에서는 지난 6월에 개봉되어 다른 아트 애니메이션에 비해 이례적으로 빠르게 극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일루셔니스트>는 프랑스의 찰리 채플린이라고 불리는 코미디의 거장이며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자크 타티가 딸에게 보내는 사랑과 애잔한 마음을 담은 미공개 된 편지를 원작으로 실뱅 쇼메 감독이 각색하여 애니메이션으로 영화한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은 1950년대 한창 로큰롤과 텔레비전 등이 새로운 대중문화로 자리 잡기 시작할 무렵이다. 주인공인 마술사는 이런 대중문화의 조류에 밀려 마술을 선보일 무대를 점점 잃게 되면서 파리에서 런던, 런던에서 스코틀랜드로 옮겨 가게 된다. 마술사는 자신의 공연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라면 비록 술에 취한 관객 앞일지라도 혹은 야유를 보내는 철없는 단 한 명의 꼬마 관객을 위해서라도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공연을 펼친다. 마침내 이 도시 저 도시를 전전하던 마술사가 다다르게 된 곳은 스코트랜드의 작은 시골 마을의 술집으로 그곳에서 마술사의 존재를 믿는 순수한 소녀 앨리스와 만나게 된다. 인생의 뒤안길, 마지막 여정을 걷고 있는 한물간 마술사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려 하는 소녀 앨리스, 두 사람의 엇갈린 여정이 교차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마치 아버지와 딸처럼 유대감을 느끼며 마술사는 앨리스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하고, 앨리스는 마치 철모르는 딸처럼 마술사에게 원하는 것이 점점 많아진다. 왜냐면 앨리스에게 마술사는 ‘키다리 아저씨’같이 무엇이든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감독의 작품들 중 눈에 띄는 특징은 바로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대사를 굉장히 아낀다는 점이다. 어느 한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대사들이 배경음처럼 어우러지면서 관객들이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신경 쓰기보다 캐릭터의 움직임과 한 장면 한 장면이 들려주는 시각적 즐거움으로 작품을 읽어 줬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고 있다. 예술적 감각뿐만 아니라 음악적 감각도 뛰어난 감독은 전작 <벨빌의 세 쌍둥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에서도 직접 작곡에 참여 했을 정도로 발군의 음악적 실력을 자랑하고 있다. 이번 작품이 자크 타티 감독에 대한 오마쥬답게 관조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연출해 보고 싶었다는 감독은 화려한 카메라 연출을 극도로 자제하고 마치 관객들을 연극무대로 초대하고 있는 듯 하다. 그러나 마지막에 한 번, 자신과 동고동락했던 토끼를 놔주는 장면에서 360도로 회전하는 화려한 카메라의 움직임으로 스펙터클한 영화적 연출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마치 성장한 딸을 이제는 보내야하는 애잔함과 함께 마술사로 보냈던 자신의 일부를 떠나보내야 하는 시원섭섭한 마음의 춤사위처럼 말이다.
<일루셔니스트>는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주고 싶어 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주변 환경에 자연스럽게 동화되면서 앨리스의 외모도 화려하게 변해 가고, 결국 사랑하는 남자와 떠나가지만, 작품 속 내내 흐르고 있는 것은 바로 아버지가 딸에게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 소녀에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딸을 보내야 하는 아버지의 애틋한 마음이다.
“마술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메모를 남기고 기차를 타고 또 어디론가 떠나는 늙은 마술사와 자신에게 맞는 세대와 환경에 적응하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 떠나는 앨리스 모두에게는 새로운 희망을 위해 선택한 아름다운 이별이기에 그 결말은 결코 슬프거나 암울하지 않다. 더욱이 마지막 장면에서 엷은 미소를 짓는 마술사를 만나게 되면서 이 또한 인생을 보는 아름다운 방법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