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
[초이스]검은 갈매기
노경태, 2011
그간 다소 실험적 화면을 선보였던 노경태 감독이 세 번째 장편 <검은 갈매기>에서는 보다 친절하고 관습적으로 접근하며 관객을 배려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크게 눈에 띈다. 물론 이것은 감독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얘기다. 원래 노경태 감독의 영화는 감독이 이끄는 대로 영상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이야기의 퍼즐이 맞춰지고, 그 퍼즐이 맞춰지는 순간 커다란 감정의 파고가 찾아온다. 그 감정이 거대한 슬픔이든, 절망이든. 파편화된 개개인의 일상이 나열되면서 중첩되다가 어느 순간, 전혀 상관없는 각각의 인물인 줄 알았던 이들의 관계가 폭로되며 완전히 다른 맥락이 새로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검은 갈매기> 역시 다를 바 없다. 다만 이전 작품들에서 그 지리멸렬한 개개인의 일상을 따라가는 과정이 조금 버거웠다면, <검은 갈매기>에선 훨씬 쉽게 따라가며 이야기를 구축할 수 있다. 주인공들은 이제껏 영화나 드라마에서 흔히 등장하던 유형의 중산층의 인물들이며, 영화의 중심을 관통하는 거대한 비극적 사건이 이미 일어난 뒤다. 이전 영화들에선 등장인물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며 영화를 응집시키는 거대한 사건 따위는 없었다.
화가인 남자는 어린 딸을 잃었고, 같은 사고로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는 아내의 병수발을 들며 병원에 출입하고 있다. 남자는 아직까지도 경찰에 출두해 같은 진술을 반복하며 피해자 가족인지, 용의자인지 모를 대접을 받는다. 이는 남자의 정부도 마찬가지. 이들은 남자의 아내와 딸이 사고를 당하던 그 시간 모처에서 성관계를 맺고 있었고, 경찰 앞에서 그 사실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증명하며 반복적인 모멸감에 시달린다. 그런가 하면 대학교수와 그의 아내는 지리멸렬하고 히스테릭한 일상에서 서로 소원한 관계를 겨우겨우 이어간다. 일상을 공유하지 않는 부부, 그리고 경찰의 개입으로 불유쾌하게 지속되는 관계의 커플, 이들의 일상이 교차되면서 만들어지는 불온한 분위기는 이미 이 거대한 사건의 내막이 무엇인지 관객으로 하여금 쉽게 짐작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두 커플이 모종의 사건으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시점은 영화가 한참 진행된 후다. 이 ‘사실’이 확인되면서 두 커플은 조금씩 얽히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대학교수의 아내가 적극적으로 화가인 남자 주변을 맴돌기 시작하면서 영화의 이야기는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죄책감과 용서라는 차원을 이야기의 기본 프레임으로 잡았지만 <검은 갈매기>는 이를 쉽고 단순하게 풀어내지 않는다. 영화 속에서 정말 피해 당사자라 할 만한 인물들은 말이 없고, 영화를 끌어가는 이들은 모두 일련의 ‘가해자’로서 각자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더 큰 가해자’, 더 큰 ‘죄인’을 향해 울부짖거나 책임을 묻는다. 흡사 자신이 지게 된 짐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하며 책임을 넘기려는 듯이. 그런데 이 ‘죄책감의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존재하는 ‘가장 큰 가해자’는 정작 자신의 행위에 대해 별다른 죄책감이 없다. 그리하여 그에게 분노하며 공포를 느끼는 순간 불현듯 물음표가 덮친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우리의 속죄와 구원의 본질은, 그 속내의 음흉한 희망처는 과연 무엇인가. 대부분의 속죄란 나의 가해사실을 잊고 짐을 덜기 위한 편리한 면피의 길은 아닌가.
인간의 윤리의 의미를 의심하게 만드는 이 물음 앞에서 예상치 못했던 파국이 일어나는 가운데, 우리는 거대한 한숨과 절망으로 이 영화의 마지막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 <허수아비들의 땅>에서 버려진 경험을 공유하는 소년 소녀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할 때의 그 아득한 느낌이나 <마지막 밥상>에서 배태된 이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 장면의 그 아련한 느낌과 달리, <검은 갈매기>의 엔딩은 순식간에 출구 없는 공포의 순간으로 줄달음친다.
관객들의 어려움의 호소를 의식한 듯, 이전의 플롯 구성의 방식을 좀더 단순화해서 반복하면서 한결 친절해진 설명의 화면을 덧붙이려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더없이 자극적인 소재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전의 <마지막 밥상>과 <허수아비들의 땅>을 좋아했던 관객들에게 <검은 갈매기>가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검은 갈매기>에 이르러서, 오히려 <마지막 밥상>과 <허수아비들의 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어쩌면 여전히 노경태 감독의 영화가 낯설거나 ‘어렵다’고 느껴지는 관객들에게, <검은 갈매기>는 <허수아비들의 땅>과 <마지막 밥상>으로의 진입을 좀 더 쉽게 해주는 통로와 같은 영화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노경태 감독의 영화는 충분히 그런 수고와 인내를 감내할 만하다. 근래의 감독들 중 노경태 감독의 작품만큼 영화의 가장 큰 요소, 즉 이미지와 시각적 요소를 극대화하여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이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